[MT리포트-의사 2000명 vs 의과학자 0명]①6개월만에 ‘의과학자 양성’ 뒷걸음
정부와 의사단체의 정면 충돌 틈바구니에서 관심 밖으로 밀려난 국정과제가 있다. 대통령이 여러 번 강조했던 ‘의과학자 양성’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와중 ‘K-방역’이 주목받았지만, 감염병의 게임체인저는 미국·유럽의 백신이었다. 의료 서비스는 앞섰지만 의학은 뒤처진 한국이 의과학자를 주목한 계기다. 그러나 연 2000명 의대 증원에 의과학자 몫은 없다. ‘임상과 연결된 의과학’ 언급은 현상 유지와 다름 아니다. 의료개혁 막판 협상에 의과학자 양성이 다뤄져야 할 이유다.
의대증원 갈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의과학자 육성 의제가 사실상 실종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19일 충북대에서 열린 ‘지역완결적 필수의료 회의’에서 “임상의사뿐 아니라 관련
의과학 분야를 키우기 위한 의료인 양성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지 6개월 만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달 20일 브리핑에서 “의과학자를 별도의 트랙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의학과 내에서 임상과 연결된 의과학으로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 2000명 의대 증원은 완고하지만, 이중 의과학 육성을 위한 정원은 단 1명도 내주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세계 ‘톱100위’ 의과학자…한국인 0명
━
의과학자란 의사 면허(MD)를 갖고 박사 학위(PhD)까지 취득한 과학자를 일컫는다. 임상을 기반으로 질병을 연구하며 관련 분야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역할을 맡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양성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의료 서비스가 발달한 한국은 철저한 방역이 최선이었을 뿐 감염병 해결의 열쇠였던 백신은 의과학 역량이 뛰어난 미국·유럽 등 선진국에 의존했다.
한국은 의과학의 불모지다. 우리나라 의대·의전원 졸업생 중 의과학자로 양성되는 경우는 1%에 그친다. 연 3058명의 정원을 고려하면, 연 30명 정도다. 반면 세계 바이오산업을 주도하는 미국은 1960년대부터 의과학자 양성 전문과정을 운영했다. 약 120개 의과대학에서 MD와 PhD를 모두 보유한 졸업생의 83% 정도가 임상의가 아닌 의과학자로 활동한다.
이런 역량 차이는 객관적 지표로도 드러난다. 학술 플랫폼 ‘AD과학지수(AD Scientific Index)’가 공개한 ‘2024 전세계 의학·보건학 과학자’ 상위 100위권에 한국인은 단 1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미국 의과학자가 59명으로 가장 많았고, 영국이 16명, 캐나다 5명 등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2명)과 싱가포르(2명), 파키스탄(1명)이 이름을 올렸다.
AD과학지수는 ‘구글 스콜라’의 h-인덱스(h-index, 개별 연구자의 업적·성취·영향력을 지수화한 것)와 i10 인덱스(최소 10회 이상 인용된 출판물 숫자)를 기반으로 과학자의 6년 생산성 계수를 분석한 결과다. 한국인 중에선 성균관대 의대 김기현·이지연 교수의 순위가 가장 높았다. 그러나 AD과학지수 전세계 1위(로널드 케슬러 하버드 의대 교수)와의 h인덱스 포인트 차이는 2.6배 가량이었다.
임상의 연구 지원해도 ‘의과학자’ 양성은 난망
━
윤석열 정부는 일찌감치 ‘의과학자 양성’을 국정과제로 내세웠지만, 최근 의료개혁 갈등 과정에서는 다소 뒷전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지난달 20일 정부의 의대 증원 계획이 발표된 가운데 서울대가 ‘의과학과’ 학부 신설을 전제로 정원 50명 배정을 신청했지만, 정부가 모든 정원을 서울 밖에 배치하면서 무산됐다. 당시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기존 의대에도 의과학을 하는 분이 있다”면서 “이들이 진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연구를 병행해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드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의과학자 양성을 둘러싸고 의학계는 기존 의사의 연구환경 지원 확대를, 과학계는 ‘과학의전원, 의과학자 학부’ 등 공학 역량을 더한 의과학자 과정의 별도 신설을 주장하는 가운데 정부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는 표정이다. 그러나 과학계는 대규모 의대 증원이 현실화하면 우수 이공계 인재들의 ‘쏠림’이 더 커질 것이고, 기존의 커리큘럼을 고수하면서 의과학자의 길을 선택하는 인재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진단이다.
일각에선 의과학자 교육을 받은 인재가 결국 임상의를 택하면, ‘의사가 되는 제2의 통로’만 터 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서울의대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설문에서, 응답자 83%는 의과학과 신설에 대해 ‘의과학자가 아닌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분야로 편입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KAIST(카이스트) 토론회에 참석한 김성국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는 “스탠퍼드 의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졸업자도 70%만 연구를 이어간다”며 일부 이탈에 대한 앞선 걱정으로 의과학자 전문 양성을 꺼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의과학자 ‘골든타임’…의대정원 논의 변수될까
━
과학계에선 막판 의대정원 논의에서 의과학자 육성을 위한 대책이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임기철 GIST(광주과학기술원) 총장은 지난달 28일 간담회에서 “의대 증원 인원 2000명 중 10%는 의과학자로 배정해야한다. 의과학자는 미래 우리가 반드시 확보해야 하고 지원해야 할 분야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과기의전원 설립을 올해 업무계획으로 추진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별도의 대책 마련에 고심중이다. 이창윤 1차관은 “의대증원과 관련해 단기적으로 우수인재가 의대로 가는 걸 피할 순 없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의과학자가 양성돼 선순환 구조가 되길 바라고, 이에 대해 별도로 논의하려 한다”고 말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