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증원과 관련해 대국민담화를 가졌다. 대통령실은 취재기자들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고 아예 브리핑룸에 취재기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임기 절반 가까운 기간에 벌어진 기자들과의 불통을 고려하면 이것은 대통령실의 권한이 아니라 언론통제에 가깝다.
권력의 언론통제는 다양한 방식, 여러 수단을 동원한다. 보답과 형벌(갈브레이스), 유인과 강제(마크 갬슨), 동의와 강압(그람시) 등 권력의 언론통제에 대한 고전적인 분석이 존재하지만 오래 된 이론들이다. 각 나라의 권력들은 경험치를 쌓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연구하며 권력의 성격에 맞춰 통제기법들을 섞어 쓰고 변용하며 진화를 거듭해 왔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사기업의 형태로 존재하거나 형식상 독립된 법적 지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권력은 언론사의 메시지를 통제하고, 자산을 규제하고, 구성원을 인사조치하고, 반발자를 폭력으로 제압하기도 한다. 이런 통제 방식이 완벽에 가깝도록 구축되어 언론이 국가 통치 시스템의 일부가 된 것을 ‘국가 흡수방식’이라고 이야기 한다.
언론사 주식을 빼앗아 재분배하고 언론인을 강제해직하고, 순치된 소수의 언론에게 보상을 퍼주던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가 ‘국가 흡수방식’으로 불린다. 언론사가 독립된 자율적인 언론 행위자가 아닌 정권의 공보기관처럼 존재했던 시절의 일이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경우 정권획득의 절차와 정통성에 결함이 큰 만큼 이를 보완하기 위해 언론통제에 힘을 쏟았다고 해석하는 건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문민 정권 시대에 권력이 법과 제도, 언론 관련 기관, 언론사 이사회, 일부 시민사회단체, 언론사 내부 구성원까지 총동원해 언론을 억압하는 오늘의 상황은 무엇일까? 게다가 다수 언론이 이에 적극 동조하거나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거나 묵인하는 건 어떤 개념, 어떤 방식의 언론 통제에 해당하는 것일까?
흔히 나치의 괴벨스를 등장시키고 파시즘을 거론하지만 모두 적절치는 않아 보인다. 차라리 보나파르트주의(Bonapartism)가 유사성이 크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제왕적 대통령이 국민에 의해 선출돼 등장한 뒤 권위주의적 중앙집권통치를 강행하고, 포퓰리즘과 선동적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통치하는 이념이다. ‘국민이 선출한’, ‘법치주의’ 등의 레토릭으로 국민의 시야를 가리고 언론의 비판을 강력히 제어하며 통치를 이어간다. 보나파르트주의가 악화하면 그 나라는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자유주의와 독재,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엘리트주의가 뒤섞이며 기괴한 모습을 띨 수도 있다.
한국 사회에 이런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운 건 이명박 정부 시절이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이 국회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대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 국정원, 경찰 등이 여론동향을 감시하고 조종하며 정치적 행위를 남발했다. 언론 자유는 급격히 후퇴했다. 프리덤하우스의 평가대로 이명박 정권 때 우리나라는 ‘언론이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나라(partly free)’로 평가가 강등돼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불렸다.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라는 불만도 이때 터져 나왔다.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자유가 곳곳에서 침해되어도 이런 국가의 행위는 법적으로 정당화되기 일쑤였다. 시장의 자유로운 지배, 탈규제화, 승자독식과 각자도생, 자본편향 등도 그 시절의 유행어다. 이명박 정권의 전근대적인 보나파르트주의는 박근혜 정권에 이르러선 대통령 최측근에서 전근대적 주술이 펼쳐지는 수준까지 악화해 국정을 농단했다. 오늘날 전개되는 용산 대통령실의 난맥상도 이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가 흡수든 보나파르트든 어떤 언론 통제 상황에서도 저널리즘은 그 본령을 지키고 맞서 저항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변함없이 굳건한 건 ‘언론의 침묵’, ‘침묵하는 언론’이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브리핑룸에서의 질문도, 참관도 허용하지 않은 권력의 횡포에 대해 ‘나홀로 담화’라며 지적한 언론사는 지상파 3사·종편 4사 통틀어 MBC와 JTBC, MBN 뿐이라 한다. ‘대통령 대국민담화의 불통’을 제목에 실어 직격 비판한 일간지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정도였다.
21세기 들어 펼쳐지는 전근대적 보나파르티즘은 무시무시한 정권에 의해서 유지되는 게 아닐 것이다. 생존 위기를 핑계로 사익 추구에 매달리며 책무를 외면한 언론이 보나파르티즘을 세상에 등장시키고 번성케 하는 것이다.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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