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총선 영향’ 등을 이유로 총선 8일 뒤 방영될 세월호참사 10주기 ‘다큐인사이트’ 불방 지시를 했다고 알려진 지 약 두 달이 지났다. 다큐 제작은 중단됐고 지난해부터 이를 제작해온 이인건 PD에겐 다른 프로그램이 맡겨졌다. 세월호 다큐 방영을 촉구하며 지난 2월부터 이어져온 KBS 앞 촛불집회도 끝나게 됐다. 사회적 참사 유족,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3일 서울 여의도 KBS 앞에서 “언론장악 저지와 공영방송 정상화”를 촉구했다.
이날 발언대엔 1994년 KBS에 입사한 아카이브 직원이자 2년 전 10·29 이태원참사 유족인 강민하씨가 올랐다. 그의 조카 이상은씨의 시간은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시험에 합격한 2022년, 이태원에서 멈췄다. 강씨는 “평소 여의도 직장인을 꿈꿨던 상은이는 KBS에 저를 보러 자주 왔었다”며 “많은 아름다운 추억과 시간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멈춰버렸다”고 세상을 떠난 조카를 떠올렸다.
강씨는 “KBS는 여러 이유로 세월호 참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며 “공영방송 KBS는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이 더 억울하지 않도록, 힘든 사람이 더 힘들지 않도록, 우리 사회 모두가 다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기여하라고, 그래서 부자건 가난하건, 서울에 살건 도서·지방에 살건, 모든 국민에게 수신료 2500원을 받는 회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세월호 유가족들이 10년간 받은 억울함에 위로는 못할망정 더 이상 상처를 드리지 않도록 노력하자. 여러분의 동료이자 어느새 참사 유가족이 된 제가 간절히 부탁드린다”며 “우리 회사 KBS, 공영방송의 사명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10년 전 세월호참사로 딸 수진씨를 잃은 김종기 세월호참사 10주기위원회 공동상임위원장(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이날 “단순히 다큐가 불방되는 게 다가 아니다. 언론 장악, 언론의 모든 역할을 말살하는 첫 신호탄”이라고 우려했다. 김 위원장은 “KBS 구성원의 자성으로 변화되어왔던 KBS가 10년이 지난 다음, 10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시민들이, KBS 구성원들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나. 다시 국민 곁으로 돌아오는 KBS로 만들어야 되지 않겠나”라고 목소리 높였다.
현직 언론인들도 마이크를 잡았다. 박상현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장은 “이런 자리에 오면 요즘 부끄럽다,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얘기를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며 “류희림 같은 사람을 배출해서 방심위(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시달리는 MBC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김백 같은 사람 배출해서 또다시 어려움에 빠지고 있는 YTN 동지들에게 죄송하고, 또다시 KBS 앞을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시민 여러분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고은상 MBC기자협회장은 윤 대통령 취임 후 MBC 기자에 대한 대통령 전용기 탑승 배제와 수사·압수수색, MBC 세무조사,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해임 시도, 권익위 조사와 감사원 감사, 방심위 중징계 등 MBC를 향한 전방위적 압박을 소개한 뒤 “심지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이란 자는 ‘MBC 잘 들어’라며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을 언급했다”며 “시민의 입을 직접 틀어막는 건 물론이고 언론에 재갈을 물려 길들이려 장악하고 있다. MBC 기자들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민영화가 이뤄졌거나 그 길목에 놓인 언론사 구성원들도 발언을 이어갔다. 고한석 언론노조 YTN지부장은 이날 김백 신임 사장이 본인 취임 전 YTN의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김건희 여사) 의혹 보도들을 사과한 것을 두고 “언론은 권력을 비판한다는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 뿐이다. 그것을 사과한 것을 저희가 사과한다”고 했다. 이어 “4월16일 세월호 관련 콘텐츠를 만들었다.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방송될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송지연 언론노조 TBS지부장은 “언젠가부터 밤잠을 자지 못한다. 왜 나라가, 사회가 이 지경이 됐을까, 왜 TBS는 사라져야 될까, 왜 내 동료는 떠나야 하나, 왜 이 자리에서 외롭게 싸우는 걸까, 늘 의심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은 자꾸만 우리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며 “모든 것은 금이 간다. 빛은 거기로 온다. 윤석열 정권의 무도함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균열을 깨버리자”고 했다.
정권의 언론통제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비판 받는 방심위 내부에서 류희림 퇴진을 외치며 저항을 이끌고 있는 김준희 언론노조 방심위지부장은 “최근 KBS 출신 모 인사에게 세월호 다큐 불방 얘기를 했더니 제게 ‘KBS는 불방이 불가능한 방송사’라고 하더라”며 “그 사람이 지금 방심위 사무총장으로 온 이현주씨다. 2015년 KBS ‘시사기획창’ <친일과 훈장> 불방 사태의 책임자였다. 진실을 가리고 지우려는 자들이 KBS, 방심위에서 언론 자유를 짓밟고 있다”고 했다. KBS 기자 출신 이 사무총장은 류희림 방심위원장 취임 후 임명됐다.
KBS가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해주길 바란다는 대학언론, 시민사회 목소리도 전해졌다. 김한결 서울대저널 기자는 “서울대저널에 ‘기억은 권력이다’라는 코너 기사가 있다”며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은 지금 기억이 권력이란 말의 의미를 새삼 되새긴다”고 말했다. 그는 “저널리즘의 본질과 언론 존재 의의를 의심하지 않도록 공영방송이 본보기가 되어주면 좋겠다. 슬픔과 아픔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왜곡되고 묻히지 않도록 힘써주기 바란다”고 했다.
기선 ‘인권운동공간 활’ 활동가는 “이곳은 10년 전에 처음으로 세월호 가족들을 만났던 자리”라며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의무가 있다면 그건 ‘총선에서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치적 프로그램’이라는 속이 뻔한 말로 검열을 저지를 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이 참사와 놓쳐버린 이들을 기억하고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 이인건 KBS PD, 김한결 서울대저널 기자, 기선 활 활동가는 참석자들을 대표해 ‘언론장악 저지,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시민선언’을 낭독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결의 내용으로 △시민과 언론노동자 연대 △언론에 대한 반헌법적 검열과 탄압에 맞서고 흔들림 없이 진실보도 △현업언론인들은 언론자유 수호와 권력 감시의 사명을 더욱 강력히 실천하길 촉구 등의 결의를 밝혔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