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여론이 압도적으로 ‘정권 심판’ 쪽으로 쏠려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공천 잡음으로 시끄러울 때만 해도 ‘정권 안정’론과 ‘정권 심판’론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나 싶게 ‘정권 심판’ 바람이 거세다.
바람의 방향을 결정한 이는 대통령 자신이었다. 모처럼 여당 지지율이 올라가는 듯 보이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년간 자신이 보였던 모든 무능과 독선, 무지와 오만의 압축판 같은 행동을 고삐 풀린 듯 쏟아냈다. 마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이끄는 여당의 선거 승리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여당 지지율 증가에 기여했던 ‘의대 정원 증원’ 같은 선거용 시책마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힘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심판’의 깃발을 누가 더 높이 드는지, 누가 더 힘차게 흔드는지를 놓고 경쟁하지 않을 수 없다. ‘정권 심판’을 명분으로 비례위성정당을 함께 만든 민주당과 그 주변 세력들은 물론이고 다른 야당들도 저마다 ‘정권 심판’을 외친다. 심지어는 국민의힘 당권 경쟁에서 파생된 정당인 개혁신당조차 요 며칠 사이에는 ‘우리야말로 윤석열 정권의 호적수’라는 논리로 지지를 호소한다. 누가 봐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포위되고 고립되어가는 형국이다.
‘정권 심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예기치 않은 조국혁신당 바람에 관해 말들이 많다. 하지만 이 역시 ‘심판’ 민심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한다. 물론 ‘조국’이라는 개인 이름을 당명으로 내세운 것은 2000년대 말의 ‘친박연대’를 능가하는 정당 정치의 퇴행이다.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투표는 조국혁신당)’라는 해괴한 사자성어까지 지어내며 또 다른 형태의 ‘위성정당’을 자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쨌든 20%를 넘나드는 유권자가 조국혁신당을 유효한 정치적 무기로 승인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3년(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은 너무 길다”는 메시지에 열렬히 반응했다.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이라는 구호가 다른 어떤 공약보다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과연 어떻게 조기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많은 이가 ‘윤석열 대통령’을 인내해야 할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에 아무튼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니 조국혁신당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따지기 전에 일단은 이 당에 대한 지지로 표출된 현실부터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그것은 윤석열 정부가 거의 2/3에 달하는 국민의 마음에서 이미 ‘탄핵’ 상태라는 사실이다.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펼친 행적만으로도 윤석열 정부는 민주당 지지층을 넘어 이른바 중도층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시민에게 불신임을 당하는 기적을 이뤄냈다. 더구나 아무도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윤 대통령이 통치 노선이나 방식을 바꾸리라 기대하지 않으며, 이것은 누구나 동의할 합리적 판단이다. 조국혁신당 지지 돌풍은 어쩌면 이런 낭패감과 절망감의 다른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정부-여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여론 흐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정권 심판’ 민심의 도구로서 제 할 일을 찾는 것이다. 이념의 좌, 우를 떠나 모든 야당은 이번 국회에 어디까지나 ‘윤석열 정권 심판’의 위임을 받아 진출하는 것임을 철저히 자각해야 한다. 모두가 ‘정권 심판’ 합동작전에 함께 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정당이든, 시민사회 세력이든, 시민 개인이든, 미리부터 명철히 내다봐야 할 게 있다. 그것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실질적’ 심판이 기대보다 그렇게 시원하거나 장쾌한 모양새를 띠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아니, 이는 차라리 지루하고 위험천만하며 혼란스러운 과정이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조국혁신당이 상징하는 방향과 실제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제22대 국회는 십중팔구 여소야대 국회가 되겠지만, 사실 이는 제21대 국회 의석분포의 반복이다. 4월 11일부터 펼쳐질 세상은 전혀 새로운 형국이 아니라 그저 지난 2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야당들이 복잡한 협상을 거쳐 새 법률을 통과시키더라도 윤석열 정부는 이제껏 그랬듯이 매번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다. 여소야대 국회와 거부권 중독 대통령이 일상적으로 대치하면서 어떤 입법도 이뤄지지 못하는 세월이 최장 3년간 지속될 것이다.
다만, 바뀌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여소야대에서 ‘야대’의 일부 구성요소가 바뀌었다.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을 외치며 지지를 받은 조국혁신당 등이 새로 등장했다. 그러나 현 헌법에서 대통령 임기를 조기 단축시킬 제도적 통로는 탄핵뿐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무능과 독선, 무지와 오만’은 탄핵 사유가 되지 못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와 같은 명백한 범법행위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탄핵을 결정하는 주체 또한 국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민들 자신도 아니다. 헌법재판소다.
물론 탄핵해야 하는 상황까지 된다면 탄핵을 해야겠지만, 현실의 탄핵 절차와 윤석열 정부 조기 종식의 열망 사이의 간극이 이러하다. 말하자면, 윤석열 정부와 제22대 국회 사이의 대치는 기대보다 지루하게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여전히 ‘3년’ 혹은 그에 준하는 시간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지난 2년 같은 시간 낭비를 3년이나 더한 뒤에 다음 대선을 치르는 경로가 여전히 상수이며, 설령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이는 어쨌든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 다음일 것이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떠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을까? 결코 짧지는 않을 ‘심판 과정’을 어렵사리 통과하고 난 뒤에 우리가 처해 있을 시간과 공간은 어떤 상태일까? 윤석열 정부의 시간은 마감되거나 마감에 가까워지는 반면 제22대 국회의 시간은 남아 있을 그 역사적 순간에 한국 사회가 맞닥뜨려야만 할 운명은 무엇일까?
‘심판 이후’ 또한 준비하는 국회가 필요하다
그때 한국 사회는 세계사의 또 다른 분수령으로 기록될 2020년대의 대부분을 허비했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기후급변, 돌봄위기, 미중충돌 같은 복합위기에 대응했어야 할 소중한 시간을 날려 버렸다는 사실 앞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윤석열 정부’라는 낡은 가림막을 치우는 순간, 이런 두려운 진실이 갑자기 숨 막히게 다가올 것이다. ‘윤석열 정부 심판’ 다음날은 결코 상쾌하거나 청명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극명한 사례는 기후위기다. 극우언론의 선동 속에 핵발전소에 대한 때늦은 사랑이 유행하고 윤석열 정부가 이런 시대착오적 열광의 화신인 양 행세하는 동안, 나라 밖 세상은 소형이든 뭐든 핵발전 신화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미친 듯이 재생에너지 기술 개발을 가속화해왔다. 여기에서 몇 년 더 지나고 나면, 대한민국은 재생에너지 설비가 다른 나라에 비해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기술 역시 한없이 낙후한 신세가 돼 있을 것이다. 이 몇 년간의 낙오는 어쩌면 영영 극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격차로 계속 남을 수도 있다.
좁은 의미의 기술만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며 축적해야 할 경험과 지식, 정서와 지혜의 측면에서도 한국 사회는 저만치 뒤쳐진 처지가 될 것이다. 시급히 재생에너지 확충이나 기후재난 대응 계획을 세우고 다양한 시민사회 주체들의 참여 아래 이를 지역 회생이나 농업 재활성화의 기회로 삼아야 할 때에 우리는 20세기식 개발주의의 환상을 좇느라, 혹은 그와 싸우느라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후위기는 단지 대파와 사과 가격만으로 우리를 당황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길어도 3년은 넘지 않을 ‘윤석열 정부 종식’의 시간지평 안에 당도할 현실이다. 달리 말해, 2028년까지 지속될 제22대 국회가 임기 중에 필연적으로 목도하게 될 현실이고, 앞장서서 책임져야 하게 될 현실이다.
그러니 차기 국회는 ‘정권 심판’의 국회여서만은 안 된다. 또한 ‘심판 이후’를 준비하는 국회여야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기후나 노동 관련 후보는 하나도 없이 ‘검찰 독재 타도’ 하나만을 밀어붙이는 조국혁신당이 새 국회의 구성요소여야 한다면, 바로 이 빈 곳들을 채울 세력들 또한 반드시 원내에 포진해야만 한다. 불평등과 기후급변, 돌봄위기와 지역소멸에 맞선 도전을 책임질 세력들이 비록 소수라도 꼭 현 정부-여당을 포위한 진용의 일부를 이뤄야 한다.
다름 아니라 ‘심판’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때에야말로 진짜 삶의 문제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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