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평생 환자 수만 명을 치료하지만 의과학자(MD-phD)는 수억 명을 살릴 수 있다.’
의과학자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말이다. 의과학자는 의사자격과 기초과학 연구능력을 갖춘 의사를 말한다. 의사 면허를 가졌지만 환자 진료보다 백신이나 치료제, 혁신의료기술 R&D(연구·개발)에 주력한다. 1921년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을 발견한 ‘프레더릭 밴팅’, 1928년 인류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을 찾아낸 ‘알렉산더 플레밍’,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만든 ‘조너스 소크’ 등이 대표적 의과학자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전 지구인을 가택연금한 코로나19 팬데믹을 종식한 것도 의과학자들이었다.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와 손잡고 세계 최초로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독일 바이오벤처 바이오엔테크의 우구르 사힌 사장, 카탈린 카리코 수석부사장 등이 주인공이다. 코로나 위기에서 인류를 구한 카탈린 카리코 수석부사장은 지난해 드루 와이스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의대 교수와 함께 mRNA(메신저 리보핵산) 기반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세계적인 의학 연구와 상용화는 의과학자들이 주도한다. 최근 25년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의 약 40%, 글로벌 10대 바이오기업 CSO(최고과학책임자)의 70%가 의과학자다. 한국은 상위 1%의 수재들이 의사가 되려고 의대에 가지만 의과학계에선 존재감이 미미한 게 현실이다. 연구·개발보다는 당장 돈이 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임상에만 매달리는 탓이다. 실제 국내 40개 의대가 배출하는 의과학자는 정원 3058명 중 1% 미만에 불과하다. 반면 미국에선 매년 의대 졸업생의 4% 정도인 1700명가량이 의과학자의 길을 걷는다.
절대 숫자가 적으니 연구성과도 미진하다. 미국의 비영리 학술 플랫폼인 리서치닷컴이 발표한 ‘2023년 전 세계 의과학자 순위’에 따르면 국내 의과학자 1위는 서울대 의대에 재직하다 2020년 정년퇴임한 방영주 전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꼽혔다. 하지만 방 전 교수의 전 세계 순위는 3315위에 그쳤다. 일본의 1위는 면역학 석학인 아키라 시즈오 오사카대 교수로 세계 순위 7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한국의 1위 학자보다 앞선 일본 학자가 63명이나 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내에서도 의과학자를 적극 양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서울대, KAIST, 포스텍, GIST(광주과학기술원) 등이 의과학과와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신설을 추진하는 등 움직임도 활발했다. 하지만 의대 증원 문제를 둘러싼 의정(醫政) 갈등으로 논의가 더이상 진척이 없는 상태다. 심지어 정부가 의대 정원 배정에서 서울 소재 의대를 배제하면서 서울대 등이 추진하던 의과학과 신설은 물거품이 됐다. 서울대는 교육부의 의대증원 수요조사 당시 의예과 증원 15명과 의과학과 신설정원 50명을 제출했다.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면 필수·지역의료 의사는 물론 의과학자도 자연스레 늘어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이른바 낙수효과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임상 중심의 교육 및 의료체계에선 기대난망이다. 선진국처럼 연구 중심 의대를 만들고 정책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미국은 1964년부터 의과학자 양성 프로그램(MSTP)을 운영해왔다. 매년 1조원의 예산을 투입해 의대생부터 전공의·박사후연구원·조교수까지 맞춤형 지원을 한다.
의정 갈등에 따른 의료공백이 장기화하면서 국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미 의료현장 곳곳에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제대로 된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학계 일각에선 의정 갈등의 복잡한 실타래를 의과학자로 풀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증원되는 2000명 중 일정 비율을 의과학자로 배정하는 방식으로 타협의 실마리를 찾자는 것이다. 필수·지역의료 강화부터 미래먹거리인 바이오·헬스산업 인재 육성까지 아우를 수 있는 해법을 찾는데 정부와 의료계, 학계가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