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0일 열리는 22대 총선이 본격화되었다. 지난 22일 후보자 등록이 마감되었고, 28일부터 13일간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선거가 즐거운 정치축제의 장이 될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선거는 죽기 아니면 살기,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all or nothing) 도박판이다. 대한민국 정치는 4류라는 모독을 오랫동안 받아왔지만, 정치권 스스로 바꾸고 혁신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은 이런 정치에 불신과 냉소를 보내고 있다.
정치, 선진국과 후진국을 오가는 힘
촛불시민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남북 관계, 코로나 대응 등에서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눈 떠 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회자하더니, 이번 정부에서는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떠돈다. 스웨덴에 본부를 둔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공개한 ‘민주주의리포트2024’에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지수 0.60점을 얻어 22년 17위에서 올해 30단계나 하락한 47위를 기록했다. 대통령은 지난 2년 동안 주요 행사마다 자유를 수십 번씩 외쳤지만, 연구소는 한국을 독재화가 진행 중인 42개국 중의 하나로 지목했다. 항간에 떠돈 ‘눈 떠 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바뀐 것은 정권뿐이다. 큰 재해가 일어난 것도, 전염병이 창궐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확인해 주는 생생한 증거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라는 공자의 말을 되새겨 볼 계기였다. 정치가 한 사회를 선진국이나 후진국으로 만드는 강력한 힘이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정치를 언급하기를 꺼리고 불신과 냉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의도 국회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을까?
국민은 이미 정치를 향한 믿음의 한계에 이르렀다. 한국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많은 희생을 겪은 끝에 민주주의 초석을 다졌지만, 87년 양 김 씨의 권력 쟁투로 인해 정상적인 민주화의 길을 놓쳐버렸다. 이후에도 시민은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 정부를 세웠지만, 대부분의 민주개혁정부는 시민의 소망과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지난 박근혜 정권의 퇴행을 보다 못해 1700만의 시민이 엄동설한 거리를 지키면서 촛불시민혁명을 이뤘고,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 문재인 정부가 국회에서 의석수가 부족해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 못한다고 호소하자, 시민은 투표로 여당을 압도적인 다수로 만들어 주었다. 2년 뒤 지방선거에 좀 더 힘이 필요하다고 하자, 시민은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국 모든 지역에서 압도적인 힘을 몰아주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지지와 성원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 못하고 다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제대로 된 국가와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시민은 크게 좌절했고 상심했다.
몇 번의 상처를 경험한 시민은 이제 좀처럼 정치를 믿지 않는다. 이번에도 정치권은 다시 한번 진보개혁세력에 압도적 지지를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선뜻 마음을 내진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퇴행이 워낙 심해 이를 심판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하지만, 진보개혁세력이 제대로 할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하지 않는다. 지금은 윤석열 정부에 의해 가족 파탄을 경험한 조국 대표와 조국혁신당이 제대로 된 심판과 혁신을 하겠다고 하자, 시민이 그나마 다시 조금씩 마음을 여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한국 사회는 총선 결과에 크게 상관없이 앞으로 큰 혼돈과 어려움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범야권이 헌법개정을 할 수 있는 200석을 넘지 않는 한 대통령의 독선을 제지할 마땅한 방법은 없다. 200석이 넘어 헌법개정과 탄핵을 시도할 경우에는 한국 사회 정치는 이판사판 난장판을 보여줄 것이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죽이겠다는 데에 가만히 있을 정치세력이 어디에 있겠는가?
범시민사회가 제안한 정치개혁과 개헌
지난 목요일 국회에서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정치개혁토론회가 열렸다. ‘정치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 총선이후 개헌과 정치개혁 과제 추진방안’이라는 주제로 진보·중도·보수 시민단체가 공동주최해 정치개혁을 논의했다. 흔한 정치개혁 토론회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념적으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서 진보·중도·보수 시민 사회가 한 목소리로 이제 한국은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인식을 보여주었다.
정치개혁은 정부·여당도, 야당도, 시민사회도 독자적으로 하기 힘든 과제다. 사안마다 깊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기 힘들다. 37년 전에 만들어진 87년 헌법이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70~80%의 국민과 국회의원이 동의하지만, 막상 헌법개정을 하자고 하면 정치권은 모두 꼬리를 내리고 만다. 선거법과 정당법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수많은 논의가 이뤄졌지만, 제대로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다. 온탕에 든 개구리처럼, 이런 상황이 더 지속된다면 한국 사회는 변화와 개혁에 무뎌진 채 추락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필자도 이 상태로는 총선 이후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양당은 서로의 발목을 잡아 상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데 집중할 것이고, 시민단체는 바른 목소리를 내지만 힘이 없고, 보통의 시민은 정치 냉소와 상대방을 향한 비난을 이어가며 다시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악순환을 무한 반복하면서 양극화, 저출산, 지역소멸, 경기침체, 고령화 등 복합위기에 놓인 한국 사회는 점점 헤어 나오기 힘든 늪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시민의회’ 도입 약속해야
이날 토론회에서 의미 있었던 것은 ‘시민의회’를 도입해 헌법개정·정치개혁을 모색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칼럼에서도 몇 번 시민의회 도입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현재 한국 사회의 난맥을 돌파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은 여의도 국회의 한계를 보완할 시민의회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보다는 훨씬 덜 하지만, 유럽에서도 대의제에 대한 불신이 있어 지난 2010년 이후부터 시민의회 도입이 적극 추진 중이다. 대의정당 간의 대립, 엘리트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숙의민주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시민의회를 도입해 사회적 쟁점을 진단하고 해결하자는 혁신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처럼 극단화한 이념과 정치 세력 간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더 숙의·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의회가 필요하다. 직접민주주의가 사회갈등을 유발한다는 오해가 있지만, 직접민주주의가 발달한 스위스의 사례만 보더라도 사회통합의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당사자가 아닌 시민의회에서 헌법, 선거법, 정당법 개정안을 만들고 국회에서 수용 여부를 판단하라고 하면 현재의 난맥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축구 경기의 게임 룰을 선수에게 맡겨두면 제대로 된 규칙을 만들 수 있겠는가? 적어도 게임 룰은 현명한 제3자가 나서서 만들고 선수는 수용 여부만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국회의원은 민심이라는 팬의 열광을 받으며, 입법 노동을 하는 선수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22회 국회에서 시민의회법을 제정하고, 시민의회를 도입하겠다는 목소리들이 조금씩 들리고 있다. 현재 우리 국회가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대안을 찾겠다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시민의회는 정치권이 한목소리로 도입을 말하지 않으면 현실화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번 총선을 맞이해 각 정당과 총선 출마후보자는 기존 여의도 정치가 가지는 한계를 인식하고, 한국 사회의 추락을 막기 위해 시민의회 도입을 공약으로 채택하고, 선언하기를 바란다. 시민사회는 이런 공약을 발표하고, 선언하는 후보자에게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낼 것이다.
22대 총선, 한국사회 추락과 부활의 갈림길
약 보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새로운 혁신을 만들지 못하면 추락의 길로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지적하는 것처럼, 독재화로의 퇴행을 막지 못하면 한국사회가 그동안 쌓았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든 탑은 무너질 수 있다. 혁신은 지난 2년 경험한 윤석열 정부에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기존의 여의로 국회로도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새로운 혁신은 3·1운동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오면서 항상 새롭게 만들어 온 보통의 시민에게서 찾아야 한다. 시민의 힘이 위정자들이 나라를 말아먹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우리 사회를 지키고,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K-정치와 문화를 만들었다.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은 그동안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면서 대한민국 시민이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시민의회라는 자리를 깔아주는 일이다. 제 정당과 후보자가 이 점만 인식하고 약속하더라도 대한민국은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제 정당과 국회의원 후보자가 이런 공약 제시와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풀뿌리부터 주민의회·시민의회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해야 한다. 여의도 국회와 정치권의 이전투구 속에서 가장 아프고 심각하게 피해를 입는 이는 엘리트 기득권이 아니라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이다. 사과 하나가 1만 원하고, 파 1단이 4~5천 원하는 현실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고통받는 이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지역을 중심으로 스스로 조직화를 해나가야 한다. 다른 대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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