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든 가슴 속 한켠에서 외쳐본 한 마디가 아닐까(필자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모 예능 방송에서는 점심을 먹고 복귀하던 한 회사원이 본인의 계급을 ‘노비’로 칭하며 많은 시청자들과 웃픈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퇴사라는 두 글자가 갖는 아련함은 생판 모르는 남의 퇴사 이야기에도 쉽게 대리만족과 설렘, 불안과 의문 등 다양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래서일까. 최근 MZ세대로 통하는 젊은층 사이에서 ‘시끌법석한 퇴사법’이 유행하고 있다. 사직서를 준비해 조용히 상사하게 내밀던 예전과는 다르다. 이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퇴사 사실을 알리고, 퇴사 과정을 설명하며, 심지어 퇴사 현장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방식의 독특한 퇴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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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퇴사 메일을 보냈어요. 모든 게 괜찮을 거야. 어떡해! (상사가) 전화가 되냐는데요.”
호주 직장인인 크리스티나 줌보가 숏폼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 게시한 영상 속에서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연신 호흡을 가다듬더니 마우스 커서를 딸깍여 퇴사 의사를 밝힌 메일을 보낸다. 이내 회사 인사부서와 통화를 마친 줌보는 “해냈다”며 기쁨을 표한다. 수천 명의 시청자들은 영상을 통해 그녀가 처음 불안에 떠는 모습부터 퇴사 후 감격해 눈시울이 붉히는 과정을 모두 함께했다.
해외 소셜미디어에서 직장인들이 자신의 퇴사 여정을 시청자들과 함께 나누는 ‘큇톡(Quit-tok)’ 챌린지가 유행하고 있다. 퇴사자들은 직장에 대해 느끼는 감정,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 퇴사가 삶에 미치는 영향 등을 솔직하고 생생하게 영상에 담아낸다. 미국 애리조나의 의료기기 회사에 다니던 마리사 조 메이즈 역시 이들 중 한 명이다. 그가 게시한 30초 분량의 영상에는 상사와 통화를 앞둔 퇴사자의 부담감과 그 후의 안도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퇴사자들이 큇톡 챌린지에 참여하는 목적은 크게 ‘감정적 공감’과 ‘경험의 공유’ 두 가지다. 퇴사자들은 영상을 통해 직장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시청자들로부터 이해를 구한다. 기술 회사에서 근무하던 가브리엘 저지는 ‘안티 워크 걸보스(Anti Work Girlboss)’라는 별명으로 그가 매니저에게 불만을 터뜨리며 일을 그만둘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게시했다. 저지는 “고용주가 팀원들을 해고하고 나에게 과도한 업무를 부담시키면서 직장 환경이 나빠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상을 올렸다”고 밝혔다. 일부는 재직한 회사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상사의 잘못된 행동들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공개적인 퇴사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직장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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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젊은 직장인들이 퇴사 사실을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에서 시청자들과 공유하는 ‘퇴사 브이로그’가 유행하고 있다. 퇴사 브이로그를 올리는 이들의 직업은 생산직부터 사무직까지, 직장 규모는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하다. 한국의 퇴사 브이로그 역시 직장인이 퇴사하는 과정을 풀어내지만 주로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에 초점을 맞추는 특징이 있다.
조회수가 50만 회 이상을 기록한 한 퇴사 브이로그를 올린 직장인은 “다니고 있던 직장은 업무 환경과 급여, 복지 등 근무 조건이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됐다”며 “더 늦기 전에 정말로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퇴사하고 나니 안정감이 확실히 사라졌지만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수많은 퇴사 브이로그 유튜버들 역시 “업무의 성격이 나랑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많이 내세웠다. 과도한 업무 부담, 잦은 야근, 부당한 상사의 지시, 직장 동료들과의 불화 등을 이유로 퇴사를 결심한 이들도 있었다.
퇴사 브이로그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린다. 대부분이 직장인 시청자들의 댓글이다. 응원과 부러움 등 공감을 기반으로 한 댓글이 가장 많다. 이들 중 일부는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실행력이 존경스럽다. 나도 용기를 내볼까 한다”며 자신의 퇴사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본인의 경험을 들어 섣부른 퇴사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있다. 한 시청자는 “나도 퇴사를 했지만 후회 중이다”라며 “퇴사하기 전에 반드시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확신이 들 때 퇴사하는 것이 좋다. 안 그러면 인생의 방향을 잃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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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직장인들의 공개적인 퇴사법은 회사가 열악한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부당한 업무 지시를 바로잡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 외신들은 이미 많은 회사의 인사 부서에서 큇톡 챌린지의 유행을 감지하고 또 신경쓰고 있다고 전했다. 퇴사자들의 폭로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회사들이 사내 소통 방식이나 해고를 진행하는 방식에 대해 직원들의 의견을 더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페이 데이터 플랫폼 페어컴프의 놀란 처치 최고경영자(CEO)는 큇톡 챌린지에 대해 “직장인들이 인간적으로 대우받도록 보장하는 ‘책임 메커니즘’이 됐다”고 평가했다.
불경기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규모 구조조정 물결이 퇴사 영상 유행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산업추적업체 레이오프에 따르면 기술 기업들은 지난해 초부터 31만 2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감축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직장인들은 적절한 이유 없이 정리해고 대상이 되면서 직장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쌓였다. FT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 근무와 같은 추세로 일부 기업들은 직원들을 더 면밀히 모니터링하게 됐다”며 “그러나 큇톡 영상은 직장 내 감시의 눈을 경영진으로 다시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조용한 퇴사’와 ‘시끌법석한 퇴사’ 중 정답은 없다. 단지 직장인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을 뿐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Z세대가 전반적으로 매우 회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젊은 퇴사자들은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영상에 진정성을 담아내면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시청자들 사이에 막연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바이러스처럼 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기성 세대가 존중해온 기업과의 장기적인 유대 관계나 계급 구조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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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우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일의 기쁨과 실망’ 속에서 몸부림치곤 합니다. 그리고 이는 옆 나라와 옆의 옆 나라 직장인도 매한가지일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선 결코 피할 수 없는 ‘일 하는 삶’에 대해 세계의 직장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앞으로 매주 토요일 ‘The World of Work’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글로벌 미생들의 관심사를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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