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국무총리가 평생 쌓은 커리어는 화려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수석 졸업, 미국 하버드대 석·박사쯤은 제쳐둬도 될 정도다. 포털 네이버에서 ‘한’를 검색해서 경력사항을 보니 웬만한 ‘난 사람’ 두 세명이 쌓은 이력에 버금간다. 나무위키에서는 그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윤석열 정부 5개 정부에 걸쳐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를 가리지 않고 차관급 이상 고위직을 역임한 진기록을 보유한 원로’라고 소개한다.
한덕수 총리에겐 한끗 다른 무언가가 있다. 서울대-하버드대 초고학력 코스는 비단 한 총리만 밟은 것이 아니다. 그가 한창때의 커리어를 차치하고서라도 김앤장 고문료로 18억 원을 챙기고, S-OIL 사외이사로 8천만 원의 보수를 받다가 말년에 윤석열 정부의 부름까지 받는 데는 분명 한 총리만의 남다른 처세술이 있을 테다. 요즘 유튜브에서든 출판계에서든 출신불명 작자들이 자기개발이랍시고 감언이설을 내뱉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라리 한 총리에 주목해보자. 그야말로 커리어 끝판왕인데.
최근 한 총리의 진면목을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 15일 오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3·15 아트센터에서 제64주년 3·15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3·15 의거 당시 경찰의 총탄 발포와 고문·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또 민주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고취하는 행사다. 이 자리에 한 총리가 참석했다. 한 총리는 준비해온 기념사를 읽었다.
한 총리는 서두에 경의를 표하는 대상을 분명히 하는 듯 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주신 3·15의거 유공자와 가족 여러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기념사 전문을 보면 ‘독재’라는 핵심 표현이 빠졌다. 올해 대구 2·28 민주 의거, 대전 3·8 의거 기념식 축사에서도 ‘독재’라는 표현을 뺐는데, 3·15 의거 축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3·15 의거를 이야기하면서 ‘독재’를 빼놓을 수 있는가? 지난해만 해도 한 총리는 ‘독재정권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강경하게 진압하고 결국에는 총격까지 가했습니다’라며 주어를 분명히 했다. 문재인 정권 때인 2022년에는 ‘독재’라는 표현이 6번, 2021년에는 5번 언급된 바 있다. 한 총리는 분명 ‘3·15 의거 유공자와 가족 여러분’을 언급했지만, 청자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처세술 1장 1절. ‘상급자의 의중을 파악하라.’ 직업적으로 승승장구하려면 상급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한다. 기념사만 봐서는 한 총리가 상급자 마음을 읽는 능력이 탁월해 보인다. 한 총리는 제1덕목을 정확하게 이행했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국정 운영을 보좌하는 자리다. 한 총리는 대통령의 입맛에 잘 맞고, 대통령 지지층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신경쓴 듯 하다. 지난해 기념식에는 딱 한번이라도 썼던 ‘독재’라는 표현을 올해는 아예 싹 빼버리는 섬세함. 한 총리가 비록 대정부질문에서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을 잠깐 깜빡해서 대답하지 못한 적은 있지만 ‘처세술 1장 1절‘만큼은 완벽히 체화한 듯하다. 역시 커리어 끝판왕답다.
독재라는 말은 청중석에서 터져나왔다. 몇몇 참석자들이 행사 중 “이승만 독재자!”라고 외쳤다. 이들이 손에 든 종이에는 ‘한 총리님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을 영웅이라고 하는데 기념사 전에 입장을 밝혀주십시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취재기자는 경호원이 이들을 제지하면서 소란이 일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 총리는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개를 돌려 이들을 잠깐 쳐다보는 듯 하더니 별다른 대꾸 없이 준비한 기념사를 읽어나갔다. 감히 짐작건대 똑똑한 한 총리도 맘속으로는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했을 테다. 그게 일반 대중의 상식이니까. 청중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속마음은 제쳐두고 맡은 바 임무를 해나가는 단단한 멘탈, 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총리는 연설 중반이 지나는 지점에서 “창원시민과 경남도민 여러분”이라면서 청자층을 넓힌다. 3·15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딴소리를 좀 해보겠다는 신호다. 한 총리는 “우리나라 제조업의 산실인 경상남도는 이제 국가전략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운을 띄우더니 느닷없이 대한민국을 원전 선도국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힌다. “원전산업은 기후위기 시대를 이끌어나갈 중요한 성장동력이자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이곳에 ‘방위·원자력 융합 국가산단’을 조성하고 ‘글로벌 SMR 클러스터’를 지원하는 등 원전 선도국의 튼튼한 기반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보통 시민들이 듣기에는 3·15 의거 기념식에서 뜬금없이 ‘원전’이냐 싶겠지만, 섬세한 한 총리에게는 다 계산이 있었다. ‘원전 선도국’ 발언 또한 대통령 명을 충실히 이행한 산물이다. 대통령은 3·15 의거 기념식이 열리기 약 3주 전 창원을 찾아서 ‘다시 뛰는 원전산업, 활력 넘치는 창원·경남’이라는 주제로 민생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대통령은 창원을 소형원전 생산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한 총리는 대통령의 의중을 잘 파악해뒀다가 창원에 온 김에 다시 한번 그 구상을 강조했다. ‘독재’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원전은 여섯 번 언급한 한 총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3·15 의거 기념식인데 ‘원전 띄우기’는 무리수 아니냐고?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론 보통 시민의 눈으로 보면 안 된다. 잊지 말자. 윤 대통령과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한 총리처럼. 윤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한국 원전산업의 아버지쯤으로 여긴다. 윤 대통령은 창원 민생토론회에서 “원자력의 미래를 내다봤던 이승만 대통령께서 1956년 한미 원자력협정을 체결하고,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해서 원전의 길을 열었다”며 “실로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요즘 영화 건국전쟁 흥행으로 “이승만의 ‘공’도 함께 봐야한다”는 말이 떠돌지 않나. 한 총리 기념사 전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대통령이 받드는 이승만의 ‘공’을 끼워넣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엿보인다. 이승만 ‘독재’는 은연중 가리고 (대통령이 말하는) ‘대단한 혜안’은 은연중 끼워넣는 고급 기술은 과연 한 총리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