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이어 인턴, 전임의, 교수까지 ‘사직’ 행렬…예비의사 의대생은 ‘집단휴학’
‘전공의·의대생→전임의→교수’ 반복된 집단행동 패턴
중재한다던 교수들 “정부가 먼저 ‘2천명’ 포기해야”…’양보’ 먼저 요구
“환자 버리는 것 아니다” 주장하지만, ‘집단 이기주의’ 비판 목소리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의대 교수들이 오는 25일을 사직서 제출일로 제시하며 집단사직에 나서기로 해 의료 현장이 한층 더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우려된다.
사직서가 수리될 때까지 의료 현장을 지키겠다고 한 만큼 당장 의대 교수들이 무더기로 병원을 떠나는 일은 없겠지만, 이미 한 달 가까이 이어지는 의료 현장의 ‘공백’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교수들이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들이 정부가 ‘먼저’ 2천명 의대 증원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집단행동’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000년 의약분업, 2020년 의대 증원 반대 등 자신들의 ‘집단이익’이 걸릴 때마다 똘똘 뭉쳐 극단적인 투쟁을 벌이는 의사들에 대해 불안에 떠는 환자들은 물론, 많은 국민이 ‘집단 이기주의’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 한손엔 사직서, 다른 한손엔 ‘증원 철회 요구’…중재 가능할까
17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전국 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국의대교수 비대위)는 지난 15일 밤늦게까지 20개 의대가 참여한 가운데 회의를 연 뒤 16개 의대 교수들이 오는 25일 사직서를 제출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4개 의대 교수들은 다음 주 설문조사를 진행한 뒤 동참 여부를 결정할 계획인데, 가결될 가능성이 높다. 회의에 참석한 의대 외에 다른 의대로 이런 움직임이 퍼질 여지도 많다.
지난 11일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집단사직 결정을 내리면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방안 도출에 나서지 않을 경우”라는 조건을 달았는데, 이번에도 정부에 ‘양보’를 요구한 건 마찬가지다.
비대위 방재승 위원장은 16일 기자회견에서 정부와 의사단체 모두의 양보를 강조하면서도 “정부가 제일 먼저 ‘2천명 증원’을 풀어주셔야 합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의료 파국을 막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전공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정부가 ‘먼저’ 2천명 증원 발표를 철회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대학 교수들이 전공의나 의사단체들의 입장에서 정부에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전공의들과의 소통은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은 지난 12일 서울의대교수 비대위가 중재안을 내놓은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의대교수 비대위와 합의한 사안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는 ‘의대 증원을 1년 뒤에 결정하고 국민대표와 전공의가 참여하는 대화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방 위원장은 이날 전공의들과 대화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의에도 “계속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다”고만 짧게 말했다
◇ “중재자 아닌 당사자”, “환자 대신 제자냐” 비판 목소리
의대 교수들이 집단사직을 결의한 배경에는 처벌을 앞둔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전공의가 사라진 의료 현장의 힘든 상황도 있지만, ‘의대 증원’ 자체에 대한 교수들의 강한 반대가 결정적 요인으로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대교수 비대위가 지난 11일 사직 계획과 함께 공개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서울의대 교수의 66%는 ‘(의대 증원) 전면 재검토 후 재논의’를 정부와 의료계 사이 타협 방안으로 꼽았다.
99%는 정부의 ‘2천명 증원안’이 과학적·합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특히 60%는 ‘정부가 2천명 증원에 대한 타협은 없다고 못 박은 상황에서 모든 교수들이 학생, 전공의들의 복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공의·학생들의 복귀보다도 ‘2천명 증원’을 막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교수들이 절반을 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의대 교수들이 과연 ‘중재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처럼 본인이 의사인 의대 교수들이 정부와 전공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는 힘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환자 대신 제자를 택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국장은 “똑같이 의사이니, 의대 교수들이 전공의들과 같이 대응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라며 의대 교수들이 중재자가 아닌 ‘당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들은 의사들과 꼭 대화를 해야하고 (증원 방침을) 후퇴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며 “그동안 의료정책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의사)가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해왔다는 것인데, 이를 반복하겠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 ‘집단이익’ 걸릴 때마다 한 몸처럼 극한투쟁…’의사불패’ 반복되나
남 국장은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에서) 빠진 뒤, 전임의들이 빠지고, 다시 전문의들(교수들)이 빠지는 흐름을 보이는데, 이는 전과 다른 모습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사단체 인사가) ‘정부는 의사를 이길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은 이런 수순을 염두에 둔 것이었던 것 같다”며 “이렇게 하면 정부가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그림’이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의사단체들이 반발한 뒤 의대생이나 전공의들이 집단행동을 하고, 여기에 교수들도 동참하는 식의 모습은 그동안 ‘의정(醫政) 갈등’이 있을 때마다 반복됐던 흐름이다. 그때마다 정부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2000년 의약분업 추진 때도 의료계는 전공의부터 동네의원까지 대규모 파업에 돌입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고, 의료대란 현실화에 겁을 먹은 정부는 ‘의대 정원 10% 감축’과 수가 인상 등으로 양보했다.
2020년 의대 증원 추진 때도 의협은 즉각 ‘총파업’을 선언했고, 전공의들은 ‘집단휴진’에 들어갔다. 의대생들은 동맹휴학과 함께 의사 국가고시마저 대규모로 거부했고, 의대 교수들의 사직 선언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정부는 원점에서 재논의하겠다고 ‘항복 선언’을 했다.
이번에도 의협이 먼저 ‘파업’을 언급하며 정부와 갈등을 빚은 뒤 전공의들이 집단사직하고, ‘예비 의사’인 의대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전공의에 이어 인턴, 전임의들이 떠났고, 이제 의료현장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교수들마저 집단사직을 예고했다.
방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환자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은 어떻게든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해 보려는 의지”라고 강조했지만,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의대 교수들의 집단사직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11일 MBC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9%는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했고, 58%는 적정 증원 규모를 ‘2천명 이상’으로 봤다.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으러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다닌다는 남모(77) 씨는 “의사들이 모두 사직서를 낸다고 하니 불안하기만 하다”며 “고령화로 의사 수요가 늘어난다는데, 의대 증원을 이렇게 못 하게 하면 그럼 의사 수는 어떻게 늘리냐”고 반문했다.
bkkim@yna.co.kr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