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되면 알려주는 서비스에 대기 걸어두고 다른 일 하는 ‘0차 문화’
유명 장소 직접 체험 욕구에 시간 낭비 싫은 2030세대 특성 결합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정진 이율립 기자 = “지금 오신 분들 포장은 3시간, 매장 취식은 4시간 정도 걸립니다.”
지난 16일 낮 12시께 서울 종로구 한 인기 베이커리 카페 앞. 대기번호를 받기 위해 줄을 서자 매장 직원이 이렇게 안내했다. 카페 앞에는 손님 50여명이 삼삼오오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 입구 앞에 놓인 기계에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자 대기 번호로 ‘508’이 떴다. 순서가 되면 카카오톡으로 알림을 준다는 안내 문구도 나왔다.
카페 앞에서 만난 이세미(34)씨는 “아침 10시 반에 대기를 걸어두고 친구와 함께 향수 공방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듣고 왔다”며 “워낙 대기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 2주 전부터 기다리는 시간에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워뒀다”고 말했다.
대기 등록을 위해 줄을 서 기다리던 장서영(23)·강선우(22)씨는 “3∼4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밥을 먹고 근처 소품 가게나 카페에 갈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인기 카페나 식당 등이 대기 등록을 한 손님에게 입장시간 10여분 전 카카오톡 메시지 알림을 보내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젊은층 가운데 ‘0차’를 챙기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다.
맛집에서의 식사가 ‘1차’라면 그에 앞서 대기를 걸어두고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 ‘0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무리 유명한 장소라고 해도 3∼4시간이나 기다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화제가 되는 경험을 직접 해보면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이 젊은층의 얘기다.
특히 젊은층의 경우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인기몰이를 하는 식당과 카페 등의 소식을 더 자주 접하게 되고 실제로 다녀와 SNS에 올리는 일이 잦은 편이다.
직장인 오모(29)씨는 “웨이팅이 긴 맛집에서 음식을 먹으면 ‘퀘스트’를 달성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고 했다. 퀘스트는 게임에서 이용자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를 뜻하는 용어다.
오씨는 “남자친구와 둘이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에 맛집 사진을 올려 기록도 남긴다”고 했다.
1주일에 평균 2∼3번 정도 대기가 긴 유명 식당이나 카페에 방문한다는 직장인 김모(32)씨는 “얼마나 괜찮은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유명한 곳을 경험해보고 싶다. 무엇보다 일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좋은 공간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고 싶다는 게 가장 크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왕이면 그저 그런 식당에 가기보다 유명한 곳에 가서 같은 시간에 더 가치 있는 경험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MZ세대의 경우 SNS의 영향으로 대기시간이 길더라도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려 한다”며 “이슈가 되는 식당이나 장소를 직접 체험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0차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통상 여러 시간에 달하는 대기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데 이는 시간을 가급적 효율적으로 쓰고자 하는 젊은층의 특성이기도 하다.
최근 유명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팝업스토어에 방문했다는 직장인 정모(26)씨는 “남자친구와 일찍 만나 대기를 걸어두고 근처 소품 가게를 찾았다”며 “기다리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쓰고 싶어 대기가 긴 곳에 갈 때는 근처에 구경할만한 곳을 찾아두는 편”이라고 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MZ세대는 상대적으로 더딘 경제발전, 코로나19 등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속에서 많은 좌절을 경험하며 시간을 아끼려는 태도를 자연스레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0차 문화는) 미래보다 현재를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 지금 얼마나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지를 우선시하는 지금 MZ세대의 특성과 잘 맞는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도 “SNS에서 유명한 장소를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 시간이 무의미하게 쓰는 걸 참지 못하는 특징이 결합해 ‘0차 문화’가 생겨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stop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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