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혁신과 변화의 상징으로 내세웠던 여성들을 지우고 있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던 고 송해 MC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던 김신영씨가 1년5개월 만에 하차 당한 사건은, KBS에서 최소한의 성평등 구현 의지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에 쐐기를 박았다. 공영방송 KBS가 여느 방송사보다도 시대변화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집중되고 있다.
KBS에선 박민 사장 취임 첫날인 지난해 11월13일부터 ‘윗선’에 의한 시사·보도프로그램 진행자 교체와 하차가 잇따랐다. 그중에서도 KBS ‘뉴스9’의 가장 큰 변화는 이소정 앵커의 하차였다. 이소정 앵커는 지난 2019년 지상파에서 처음 여성으로서 평일 메인 뉴스, 메인 앵커로 발탁됐다. 당시 사례는 이 앵커의 역량을 고려한 결정이면서도, 공영방송이 ‘나이 든 남성 메인 앵커와 젊은 여성 서브 앵커’라는 성차별적 관행을 깨기 시작한 상징적 변화였다.
그러나 이 앵커 하차로 KBS는 4년여만에 지상파 3사(KBS·MBC·SBS) 중 유일하게 메인 뉴스프로그램에 ‘여성 메인 앵커’가 없는 방송사가 됐다. MBC ‘뉴스데스크’와 SBS ‘8뉴스’도 평일에는 남성 메인 앵커와 여성 서브 앵커 체제로 운영되지만 주말에는 각각 이지선, 정유미 앵커가 단독으로 뉴스를 이끌고 있다. 현재 KBS ‘뉴스9’는 평일과 주말 모두 기자 출신의 남성 앵커(박장범·김현경)가 메인, 아나운서 출신의 젊은 여성 앵커(박지원·박소현)가 서브 앵커를 맡고 있다.
시사 라디오 부문에서 여성 관점의 시사프로그램을 표방해온 ‘뉴스브런치’가 폐지된 일도 상징적이다. 2019년부터 방송되어온 ‘뉴스브런치’는 여성 진행자 외에도 대부분 출연진을 30~40대 여성 전문가로 구성해, 진행자·출연자가 특정 성별에 편중된 시사 라디오 시장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지난 2022년 KBS 성평등센터·공영미디어연구소가 자사 콘텐츠 다양성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성소수자, 환경, 장애 등 주류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프로그램을 차별화했다”고 평가했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KBS는 올해 1월 ‘수시조정’ 명목으로 상당수 프로그램을 폐지하면서 ‘뉴스브런치’를 없앴다. 이전까지 ‘뉴스브런치’를 진행했던 신성원 아나운서는 ‘오늘 세계는’이라는 국제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
비슷한 시기 시청자들의 강한 반발 속에 폐지가 강행된 2TV 예능 ‘홍김동전’ 역시 여성 방송인들이 주도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홍김동전’은 홍길동전에서 모티브를 얻어 여성 메인 MC인 ‘홍진경’ ‘김숙’ 이름과 ‘동전’을 합쳐 만든 제목이었다. 지상파 방송사의 전통적 예능 포맷과 공영방송 특유의 공익적 소재가 어우러진 홍김동전은 두 여성과 장우영, 조세호, 주우재 등 남성 출연진이 활약하며 ‘레트로 예능’ 성공사례로 꼽혔지만 ‘시청층 확대 한계’ ‘재정 위기’ 등을 이유로 사라졌다.
지난달에는 KBS 1TV의 대표적 역사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이 ‘시즌 종료’되면서 여성이 MC를 맡은 프로그램이 또 하나 사라졌다. ‘역사저널 그날’은 2013년 1회 방영 때부터 최원정 아나운서가 진행해왔다. 이 프로그램의 경우 일부 제작진이 진행자 변경에 반발한 가운데 갑작스러운 ‘리뉴얼’이 결정됐다고 KBS노동조합 성명 등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일련의 사태를 둘러싼 우려는 ‘전국노래자랑’ 김신영 MC 하차를 계기로 터져나왔다. KBS 사측이 김씨에게 마지막 녹화를 약 일주일 앞두고 하차 통보한 가운데, KBS 내부에서 “젊은 여자 MC는 (프로그램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씨 하차를 비판하는 시청자 청원이 쇄도하자 KBS는 “프로그램마다 그 특성과 주 시청자층을 고려한 MC선정이 필요하다”며 김씨 진행에 대해 불만 의견이 칭찬 보다 더 많이 접수됐다고 답해 또 한 번 논란을 불렀다. KBS는 지난 2022년 김씨를 발탁하며 ‘전국노래자랑’이 젊은 여성 MC와 새출발한다고 홍보했고, 지난해 그가 포함된 ‘KBS를 빛낸 50인’ 명단을 발표한 바 있다.
KBS의 이 같은 대응은 스스로 공영방송으로서 추구해온 역할과 목표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KBS는 5대 핵심 비전 중 하나로 ‘다양성’을 밝히고 있다. 2020년에는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에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조항과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안내서’(여성가족부) 등을 수록했다. 제작안내서는 방송을 제작할 때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균형 있게 대표할 수 있어야 하며, 남녀가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특정 성이 보조 혹은 장식적인 역할만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고한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총회 일환으로 열린 ‘ABU 여성포럼’에서 KBS는 연맹 소속 방송사들과 미디어의 성평등·다양성·포용성 구현을 약속하는 ‘서울선언’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엔 KBS가 성평등한 조직문화 및 콘텐츠를 지향하기 위해 진행해온 ‘성평등 이니셔티브’로 아시아태평양 방송개발기구(AIBD) 국제미디어상 ‘지속가능성 부문’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이에 역행하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은 최근 KBS 상황을 두고 “‘해사행위’인가라는 판단이 들 정도”라고 비판했다. 김 소장은 “‘전국노래자랑’ MC로 김신영씨를 선택한 건 KBS 변화를 보여주는 굉장히 큰 사례였다. 공영방송은 올드하거나 진부한 것이 아니라 공영적 가치를 잘 지키며 변화해나간다는 걸 보여준 것이 송해 선생 후임으로 젊은 여성을 기용한 의미였다”며 “(김씨 하차는) 절차도 적절하지 않고 굉장히 일방적이었다. 시청자 청원에 대한 답변이 굉장히 무례했고, 우리 사회에서 젊은 여성을 평가하며 유난히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이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김 소장은 나아가 “공영방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앵커’의 모습을 통해 국민이 받는 메시지가 있다”며 “KBS가 한 것들은 여성 차별을 해도 되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빨리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슬아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장은 “KBS는 2018년 성평등센터를 국내 방송사 최초로 개소했다는 프라이드를 가져온 곳이다. ‘조직 내 성평등 문화 확산’을 지금도 홈페이지에 적어두고 있다”며 “공영방송은 시청률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럼에도 가져가야 하는 가치와 그에 맞는 프로그램 내용, 주제, 구성이 있어야 한다. (과거로) 복귀하는 건 변화된 흐름을 못 읽고 퇴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성평등 여부를 평가하려면) 어떤 성별이 어떤 중요도와 내용의 말을 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여성이 등장해야 여성의 멘트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는데 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면서 “KBS가 ABU 총회에서 성평등, 다양성, 포용성을 넓히기 위한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확산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자사에서도 발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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