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지난 5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사직서를 쓰고 의료 현장을 떠난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고, 대학 측의 의과대학 정원 증원 신청에 반발해 일부 의대 교수들도 사직하는 등 반발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다. 중대본은 집단 사직 후 병원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전공의들의 의사 면허를 정지하는 절차도 시작했다.
정부가 의료계 반발에 더 강경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뒤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어서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국무회의에서 “의료 현장의 주역인 전공의와 미래 의료의 주역인 의대생들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윤 대통령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확충 규모”라고 했다. 의료계와 협상해 증원 규모를 줄일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일각에서는 2000명 증원이 과도하다고 주장하며 허황된 음모론까지 제기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집권 초기 화물연대 파업 대응에서 얻은 ‘승리의 경험’이 이번 의사 집단행동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정 수행 지지율을 높이고, 더 강하게 상황을 주도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하자 업무개시명령 발동…얻은 것 없이 철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는 안전운임제 확대 시행을 요구하며 2022년 6월 7일 오전 0시부터 무기한 전면 ‘총파업’(집단운송거부)에 돌입했다. 화주가 운송기사에게 ‘안전운임’ 이상의 운임을 지급하도록 한 이 제도는 2020년 3년간 한시적으로 도입됐고 2022년 말 종료될 예정이었다. 일몰을 없애 영속화하고 전 차종으로 확대하자는 게 화물연대 주장이었다. 화물연대와 국토교통부는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과 품목 확대에 대해 논의한다’고 합의했고 집단운송거부는 일주일 만에 끝났다.
그런데 화물연대는 같은 해 11월 24일 다시 집단운송거부를 벌였다. 정부와 여당은 운송거부 이틀 전 ‘품목 확대 없이 일몰 3년 연장’을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했다. 윤 대통령은 같은 달 29일 국무회의를 주재해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라 시멘트 화물 운송기사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2004년 이 제도가 도입된 후 실제 발동된 것은 처음이었다. 업무개시명령이 발동되면 운송기사는 즉각 업무에 복귀해야 하고, 거부하면 면허가 정지되거나 사업이 취소될 수 있다.
업무개시명령은 개인사업자인 운송기사에게 영업을 강제하는 것이어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업무복귀명령이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했으나, 고용노동부는 “화물연대는 개인사업자로 구성돼 있어 노조법상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정부의 강경한 대응은 계속 이어졌다. 윤 대통령은 참모들과 비공개 회의에서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에 대해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 “핵은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대북정책을 펴왔다면 지금처럼 북핵 위협에 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토부는 12월 5일부터 업무개시명령을 위반한 운송기사에 대한 형사제재와 운수종사자격 정지 절차에 돌입했고, 결국 화물연대는 같은 달 9일 전체 조합원 총투표를 벌여 현장에 복귀했다. 총파업 돌입 16일 만이었다. 안전운임제는 그해 말 일몰 종료로 폐지됐다. 화물연대는 ‘본전도 못 찾은’ 셈이 됐다.
16일간의 강경 대응은 윤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하는 동력이 됐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2022년 8월 초 24%까지 떨어져 20%대 수준이 이어지다가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를 겪으며 36%까지 높아졌다. 화물연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웠던 점도 도움이 됐다. NBS 조사에서 화물연대·지하철 노조 파업에 대해 묻자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자제해야 한다’는 응답이 58%로 집계됐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전공의 의료 현장 떠나자 진료유지명령 발동, 면허 정치 절차 시작
의료계를 대하는 정부의 방식은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때와 비슷하다. 정부는 지난달 6일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내년 신입생부터 현재 정원(3058명)보다 3분의2를 더 뽑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의료계는 크게 반발했고, 전공의들은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현장을 떠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19일 전공의들에게 진료유지명령을 내렸다. 의료인의 사직서 제출, 연가 사용 등을 통한 진료 중단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의료계에서는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한 것은 헌법상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에 따른 것으로 진료유지명령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박 차관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의사의 직업적·윤리적 책무이자 의료법에 따라 의사에게 부여된 의무”라고 했다. 또 전공의 집단 사직은 “통상적인 사직 절차를 밟지 않아 그 자체가 무효”며 “사직이 수리되지 않으면 본인이 진심으로 (사직을) 원한다 하더라도 진료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1년 3개월의 시차를 두고 화물연대 소속 운송기사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이 내려진 것처럼 전공의들에게 진료유지명령이 내려졌다. 정부는 운송기사들에게 ‘면허 취소’ 압박을 한 것처럼 전공의들에게는 ‘면허 정지’로 압박하고 있다. 다만 화물연대는 16일 만에 얻은 것 없이 집단운송거부를 철회한 반면, 의료계는 같은 기간 일부 의대 교수들도 동조해 사직서를 내는 등 반발이 확대되고 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올랐다는 점은 같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지난달 초 29%였으나, 이달 1일 발표된 조사에서는 39%로 치솟았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어서 지지율은 더 중요하다. 연합뉴스가 메트릭스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48%가 찬성했고, ‘2000명보다 적게 늘려야 한다’는 36%, ‘현행 유지’는 11%였다. 미복귀 전공의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43%가 법에 따라 엄단해야 한다’고 했고,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21%였다.
의료계에서는 정부가 총선용으로 의대 증원을 추진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업무방해와 의료법 위반 방조 혐의로 경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은 페이스북 글에서 “전국 응급실과 중환자실에는 여전히 수많은 의사들이 환자의 곁을 지키고 있지만 의사들은 악마화되었다”며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대통령의 의도대로 ‘악마와 싸우는’ 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했다”고 했다. 그러나 박 차관은 지난달 ‘의대 증원 발표는 선거용’이라는 의료계 주장에 대해 “의사 증원 정책은 오직 국민 보건을 위한 정책적 결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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