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對)러 제재 명단에 올라 우리 정부가 조사에 나선 한국 소재 기업 ‘대성국제무역’(Daesung International Trade)은 전략 물자를 수출하면서도 당국의 신고·허가 과정을 누락했던 혐의를 받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기업이 최근 러시아로 수출했던 품목에는 무기 제조에 사용될 우려가 있는 CNC(컴퓨터 수치 제어) 밀링 머신 등 공작기계류가 포함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전략물자란 대량살상무기(WMD), 미사일, 재래식 무기 등의 제조·개발·사용에 활용될 수 있는 민군(民軍) 겸용의 이중 용도 품목이다. 현행법상 당국의 ‘허가’ 판정이 있어야 수출이 가능하다.
◇ 2022~2023년 수출 제한 품목 5건 러시아 수출
5일 해외 바이어·무역 데이터 전문 분석기업 ‘임포트지니어스’(Import Genius)가 제공한 자료 등에 따르면, 한국 소재 대성국제무역이 2022~2023년 러시아로 수출한 물품 중 전략 물자 판정 대상에 해당하는 HS코드(HS CODE·품목 분류 코드) 제품이 5건 포함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임포트지니어스는 미국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상세 수출입 내역 등을 공개하는 18개국 관세청의 빅데이터를 토대로 정보의 의미를 분석한다. 네덜란드 등지에선 이 기업이 제공한 데이터를 이용해 대러 수출 제재 위반 사실을 적발하고 제재한 사례도 있다. 이번에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이는 대성국제무역의 거래 내역 5건 역시 러시아 관세청에서 제공한 ‘한국발 러시아향 수출(from Korea to Russia)’ 데이터를 토대로 추려졌다.
세부적으로는 ▲유압척(부품 고정용 장치·삼천리 제조·2023년 1월 23일·228㎏) ▲CNC 밀링 머신(미국 캘리포니아주 옥스나드 하스오토메이션 제조·2023년 1월 11일·4658㎏) ▲CNC 밀링 머신(두산 제조·2023년 1월 11일·1만1653㎏) ▲CNC 선반(두산 제조·2022년 12월 28일·1만1010㎏) ▲CNC 선반(두산 제조·2022년 11월 3일·3570㎏) 등이다.
전략물자연구원 관계자는 “밀링머신 등 공작기계는 러시아를 떠나 어느 국가로 수출하든 전략물자인지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품목”이라며 “일반 산업용 품목을 제작하는데 쓸 수도 있지만, 미사일 부품이나 핵무기 관련 부품 등의 제작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앞서 경남 김해 상동면에 소재한 대성국제무역은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이 공개한 ‘대러 제재 리스트’(우려 거래자 목록)에 올라 논란이 됐다. 이 기업의 대표는 파키스탄인으로, 한국 생활을 오래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대표는 “러시아와 거래한 적이 없으며 주로 인도에 수출했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산업통상자원부·관세청 등 우리 정부는 미국의 제재와 별개로 우리 무역거래법과 관세법을 위반한 사실이 없는지에 대해 별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기업은 전략물자로 지정된 물품을 수출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전략물자 판정-신고-허가’ 등 적법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혐의를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략물자에 대한 최종 목적지 등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수출을 허가받지 않은 행위는 무역거래법 위반 사항이다. 수출 미신고나 허위 신고 등의 행위는 관세법 위반 사항이다.
정부 관계자는 “부산세관을 중심으로 두 가지 혐의에 모두 해당되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세관당국은 대성국제무역이 2022~2023년 러시아로 수출한 상세 품목 내역 5건에 대한 정보도 함께 참고할 방침이다.
◇ “‘전략 물자’ 맞나요?” 판정 수요 급증… 작년 4만여건
최근 국제 평화·안전 유지, 국가 안보 등 국제 공조로 수출 제재 품목·대상이 확대되면서, 전략물자 판정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전략물자 전문 판정은 허가 당국인 산업통상자원부에 수출 신고를 하기 이전에 신고 대상에 해당하는지 자문을 거치는 단계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인 전략물자관리원(KOSTI)에 따르면, 지난해 수출 품목의 전략물자 해당 여부에 대해 ‘전문 판정’이 이뤄진 건수는 약 4만1000건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 중 전략물자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대량 파괴·재래식 무기 제조용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높아 수출 허가가 필요한 ‘상황 허가’로 판정한 건수는 7000건에 달했다.
2017년 1만8038건이던 전문 판정 건수는 2018년 3만1326건으로 3만건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4만건을 돌파했다. 통상 이중 10% 정도가 ‘전략물자에 해당한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전략물자나 상황 허가 필요 물품으로 판단되면 최종 사용자·목적지 등이 포함된 양식의 신고서를 제출해 산업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전략물자관리원 관계자는 “전략물자라 하더라도 만약 미국·일본 등으로 수출하는 것은 대부분 허가가 나지만, 러시아 등으로 나간다면 허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제재 품목과 대상자가 확대되는 데다, 기업들 사이에서 전략물자 제도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지면서 최근 4~5년간 이 판정 업무가 급증한 추세”라고 했다.
러시아·벨라루스에 대한 우회 수출 등 수출 통제 의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 수출입 제한 등 행정처분 또는 7년 이하 징역과 거래가액 5배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에도 러시아 기업에 반도체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러시아의 대(對)우크라이나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미국 제재를 받은 한국인 이모씨가 적발된 바 있다. 서울세관은 관세법 및 대외무역법 위반으로 이 씨를 검찰에 송치했다. 한편 수출 허가 대상 물품에 해당하는지 등 자세한 사항은 ‘전략물자 관리시스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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