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방한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만남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미팅 일정과 장소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면서 이들의 소재 파악을 위해 취재진은 사방으로 분주했다. 과거 서초 사옥에서 만남을 가졌던 이 회장과 저커버그는 본사 대신 삼성의 영빈관 ‘승지원’으로 직행했다.
2월 28일 오후 6시를 조금 넘은 시간, 이 회장은 저커버그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챈을 승지원으로 초청해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만찬 메뉴는 한식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만남은 2시간 20분에 걸쳐 진행됐다.
두 사람은 이번 회동에서 AI 반도체와 XR 사업 관련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메타는 차세대 언어모델(LLM) ‘라마 3’를 개발 중이고,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점유율 2위인 만큼 AI 반도체 생산 관련 협력 방안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회장이 저커버그CEO와 만남 장소로 승지원을 택한 데는 두 사람의 오랜 친분 관계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두 사람은 하버드 대학 동문으로,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열리는 ‘선밸리 미디어 콘퍼런스’에서 만나며 친분을 쌓아왔다.
이후 2013년과 2014년 저커버그 CEO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으며, 이건희 선대회장 별세 시 저커버그 CEO가 추모 이메일을 보낼 정도로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국내외 주요 인사를 만날 때 승지원을 사용하고 있다. 승지원은 신뢰할 수 있고, ‘JY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인물들에만 출입이 허용되는 삼성 일가의 사적 공간이다. 굵직한 사업 협력을 비롯해 주요 사안 결정 등 재계 ‘빅딜’이 승지원에서 주로 이뤄지는 만큼 상징성도 크다.
이 회장은 2019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방한 당시에도 5대그룹 총수와 함께 승지원에서 회동을 가졌다. 2023년 10월에는 회장 취임 1주년을 맞아 일본 내 주요 협력사 모임인 ‘이건희와 일본 친구들(Lee Kunhee Japanese Friends·LJF)’을 승지원에 초청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3대 걸친 재계 교류의 장 ‘승지원’
삼성의 영빈관으로 불리는 승지원의 역사는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지원은 원래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거처였으나, 1987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물려받으면서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개조됐다.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취지에서 ‘승지(承志)원’으로 이름을 붙이고, 국내 최고 궁궐 건축 전문가인 신응수 대목장에 본관 건물 건축을 의뢰했다. 대지는 300평, 건평 100평 정도로 본관과 부속건물 등 2개동으로 이뤄져 있다.
승지원은 철저한 보안유지가 가능하고, 경영의 ‘성지’로서 상징성이 높아 정재계 인사들이 비공개로 현안을 논의하고 대책을 내놓는 곳으로 활용된다.
이건희 회장은 과거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집무실 대신 승지원에서 주요 업무를 봤다. 사장단 회의도 이곳에서 열렸다.
또 1998년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 빅딜 협상도 승지원에서 이뤄졌으며,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 회장(2001년), 주바치 료지 소니 사장(2005년), 제임스 호튼 미국 코닝 회장(2006년) 등 해외 유력 인사들도 승지원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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