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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제는 윤석열-한동훈도, 이재명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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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시작될 때만 해도 올해 총선의 주된 기조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한편에는 여전히 윤석열 정부 심판 여론이 있지만, 기세가 몇 달 전만 못하다. 오히려 정치평론가 가운데에는, 여당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보는 이들까지 있다. 그만큼 백중세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는 물론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의사 파업에도 아랑곳없이 밀어 붙이는 의대 입학 정원 증원 방침이 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다.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요즘 보이는 모습 역시 총선 지형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민주당은 공천 명단에서 이른바 ‘비명’계 현역 국회의원들을 단호히 배제하고 있다. 누가 봐도, 차기 대선 주자를 노리는 이재명 대표가 당을 더 확고히 장악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운영에서 보이는 독단적 행보만큼이나 독선적인 모습을 이재명 대표의 당정(黨情) 운영에서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총선 정국은 점점 더 안개에 휩싸인다. 바다의 두 괴물 스킬라(Scylla)와 카리브디스(Charybdis)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졌던 오디세우스마냥 민심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암초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마치고 나와 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이 아니라 ‘체제’가 문제다

이런 현실은 이미 주류 언론도 다들 짚고 있다. 윤석열과 그 후계자 한동훈이든, 반대편의 이재명이든 모두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언론이 없다. 단지 윤석열, 한동훈이 진짜 심판 대상인데 이재명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푸념하거나, 이재명이 진짜 원흉인데 윤석열도 답답하기만 하다고 가슴을 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국 양편의 지도자, 즉 특정한 ‘사람’이 문제라고 보는 점에서는 매일반이다. 검사 출신 권력광 윤석열, 한동훈 탓이라거나 온갖 의혹에 휩싸인 이재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불행은 하필이면 이 중대한 역사적 시점에 양대 정당 모두 ‘가장 이상한’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 데 있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박복한가, ‘한강의 기적’ 뒤에 점지된 운명이 ‘윤, 한’ 아니면 ‘이’라니!

하지만 이런, 진단 아닌 진단이야말로 지금 상황을 더욱 꼬이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하필 이런 사람들이 지금 양대 정당의 맨 꼭대기에 군림하는 현실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국정을 통해서든 당정을 통해서든 권위주의적 리더십 밖에는 보여줄 수 없는 인물들이 2024년 시점에 한국 정치에서 양대 정당의 최고위직을 차지한 것은 한국 정치 자체의 구조와 논리가 낳은 결과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 ‘체제’가 문제다.

어떤 ‘체제’가 문제인가? 1987년에 뼈대가 만들어지고 이후 계속 진화해 온 ‘제6공화국 정치 체제’가 문제다. 그리고 이 체제의 정점에는 누가 뭐래도 ‘대통령’이 있다. 미국이나 라틴아메리카와 비슷한 대통령제라지만, 미국과 달리 연방제도 아니고 라틴아메리카 나라들과 달리 결선투표제도 없는 한국형 대통령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제6공화국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 양대 정당이 보이는 모습은 제6공화국이 막 시작될 무렵에 정당들에서 나타난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이야 외부 인사로 채운 공천관리위원회라도 만들어 ‘공(公)’천 시늉이라도 하지만, 노태우와 삼김 씨가 각 당을 이끌던 시절에는 ‘총재’가 공천을 비롯한 만사를 다 결정했다. 오죽하면 양김 씨의 사랑방이 있던 동네가 각 정당을 상징하는 이름(‘동교동’, ‘상도동’)이 됐겠는가.

그러나 지금과 견줘보면, 비슷한 ‘사당(私黨)’화 양상에도 불구하고 양김 씨의 당정 운영에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우선 이는 당시의 정당 형태는 김영삼, 김대중의 항시적 선거운동 캠프로서 직선 대통령을 배출하기에 최적화돼 있었다. 또한 이런 정당 형태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김대중은 군부독재에서 벗어난다는 제6공화국 초기의 역사적 과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양김 씨가 각각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 양대 정당은 역시 나름대로 이후 상황에 맞게 진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양김 씨 뒤에 등장한 지도자들은 양김 씨와 달리 양대 정당을 ‘사당’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이 점이 대의민주주의가 안정화된 제6공화국 중반의 사정과 잘 맞아떨어졌다. 김영삼을 계승한 정당은 1997년에 사뭇 역동적인 당내 대선 후보 경선을 치렀고(비록 대선 자체에서는 패배했지만), 김대중을 계승한 정당은 이를 더 확대 발전시킨 국민참여경선을 치열하게 펼침으로써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양대 정당 중 어느 쪽이든 양김 시대에 비하면 현대적 대중정당에 가까워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강력한 두 명의 대선 주자를 키워내고 이 둘 사이의 역동적 경쟁을 통해 어쨌든 2017년까지 집권한 한나라당-새누리당은 이런 시대적 요청에 성공적으로 부응한 사례였다. 2010년대 초에 이들 반대편에서는 문재인과 안철수가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이런 역사적 경험을 뒤따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6~2017년 촛불항쟁과 이후 ‘촛불정부’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겪으면서 제6공화국 정치 체제는 급격하게 새로운 국면으로 내몰렸다. 우선 촛불항쟁 이후 붕괴 일보직전에 놓였던 새누리당-자유한국당은 2017년 조기 대선뿐만 아니라 2022년 대선에서도 당선 가능한 후보를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상태에서 이들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영입해 극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촛불항쟁 이후 이들이 처한 근본적 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며, 그래서 현재도 윤석열 대통령이 지목한 검찰 출신 대선 주자 한동훈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신세다.

다른 한편 촛불항쟁 직후 만년 집권당까지 꿈꾸었던 민주당에서는 또 다른 역사의 간계를 통해 유력 대선 주자가 이재명 한 사람으로 압축되는 일이 벌어졌다. 본래는 문재인 정부의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안희정이나 김경수, 조국이나 임종석 같은 인물들이 마치 2000년대에 양대 정당이 보여줬던 것 같은 당 내 경쟁 구도를 펼치리라 기대됐다. 그러나 이재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잠재 주자가 문재인 정부의 실패 모멘텀마다 한 명씩 탈락했고, 덕분에 당 내 비주류에 가깝던 이재명이 대안부재론 속에 쉽게 대선 후보가 되고 당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외형만으로 보면, 양대 정당이 모두 제6공화국 초기의 사당형 정당으로 돌아간 꼴이다. 윤석열, 한동훈의 당과 이재명의 당 모두 양김 씨가 각각 상도동당과 동교동당을 이끌던 시절에 가깝다. 두 당은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자기 당의 유일한 현재적 대선 주자(한동훈과 이재명)에게 권력을 몰아줄 수밖에 없다. 그래야 다음번 대선에서 제6공화국 정치 체제의 중심인 ‘대통령’ 자리를 수호/탈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24년 대한민국 총선은 정책 경연장이 될 수 없다.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을 어떻게 정리하고 새 시대로 나아갈지, 팬데믹 종료로도 끝나지 않은 복합위기에 맞서기 위해 한국 사회를 뒤늦게나마 어떻게 재편할지, 토론하는 장이 될 수 없다. 오직 3년 뒤의 승리를 위해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싸움일 따름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한동훈 당, 이재명 당보다 더 나은 조직 형태도 달리 없다.

그러니 ‘윤, 한’과 ‘이’를 욕하지 말자. 한국 정치의 ‘때 아닌’ 궁지를 한탄하지도 말자. 지금의 모든 사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랑거리로 치부되던 ‘K-민주주의’ 바로 그것의 산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창밖을 보며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K-민주주의’의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자

흔히 한국형 대통령제의 문제점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든다. 그러나 정말 대통령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된 게 핵심 문제인지, 혹은 그것만이 문제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내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제도들이 ‘대통령’이라는 제도 때문에 기능 장애에 빠졌다는 점이다. 국회나 정당처럼 대의민주주의의 작동에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도들이 한국형 ‘대통령’ 제도와 결합된 탓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국회는 양대 정당이 차기 대통령 선거를 놓고 전략 게임을 벌이는 장이 되었다. 입법이라는 국회의 기본 기능은 뒷전이다. 문재인 정부 말기에 180석의 민주당이 별다른 입법 활동을 하지 않은 사례나 윤석열 정부가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 매번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에서 보듯이, 입법 기능 자체가 양대 정당의 권력 투쟁 수단이 되어 버렸다. 국회가 제 기능을 안 하니 결국 대한민국 시민은 입법 통로를 원천 봉쇄당하는 꼴이다. 사실상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당 역시 시민사회의 여러 집단을 대표하면서 사회 전체의 해법을 찾는 데 기여한다는 고유한 기능에서 더욱더 멀어진다. 제6공화국 헌법의 ‘대통령’이 과연 누적되기만 하는 복합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정당은 오로지 차기 ‘대통령’직을 차지하는 게임에만 골몰한다. 이를 위해 그간 그나마 쌓아온 현대적 대중정당의 외피마저 벗어버리며, 자당의 유일한 현 대선 주자에게 당 내 권력을 몰아준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기능 장애 상태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대다수 시민들 자신이다. 현재의 실패를 낳는 요인은 대개 과거의 성공을 낳은 그 요인이라는 무거운 진실이 한국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다. 제6공화국 초기의 성공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대통령'(현 대통령이든 3년 뒤에 그리 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든)에 모든 기대를 건다. 이들에게 정치란 ‘대통령 만들기’의 감동적인 서사를 끝내 완성하는 일이며, 그래서 국회든 정당이든 시민들 자신이든 모두 이 서사의 완성에 마땅히 동원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제6공화국 민주주의’, ‘1987년 민주주의’, ‘K-민주주의’다. 이런 눈물겨운 ‘대통령 만들기’ 멜로드라마를 위해 이제 윤석열-한동훈 당과 이재명 당뿐만 아니라 조국 신당과 이준석 신당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유일한 정치는 이러한 ‘K-민주주의의 단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K-민주주의의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시민들 자신이 민주주의를 새롭게 정초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이런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오지 못한다면, 총선은 붕괴와 파국 직전의 거대한 낭비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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