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의심케 하는 2024년 2월 한국의 풍경. 카이스트 졸업생이 졸업식장에서 입이 막히고 끌려 나가는 모습이 강렬하다. 자세한 경황은 덧붙이지 않아도 모두 같은 장면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제도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대통령 경호원에 의해 같은 짓을 당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이다. 이 쯤 되면 대통령 경호의 원칙이 이와 같은 것으로 변경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무엇이라 생각하길래 주권자의 입을 틀어막는 것일까. 지난 1월 말에는 기자회견장에 모인 장애인들과 기자들을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는 일도 있었는데 현 정부하에서 집회 시위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심각하게 축소되고 있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시도 역시 우려스럽다. 방송사 재승인 등 방송 정책을 담당하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와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심의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모두 위원 구성으로 한동안 논란이 지속되었다. 정부가 야권 추천 위원은 해촉하고, 임명을 미루는 대신 대통령과 여권 추천 위원은 신속하게 임명하여 이들이 자리를 독점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5명이 있어야 할 방통위의 상임위원은 현재 대통령이 추천한 2명으로 운영되고 있고, 방심위 역시 9명 중 여권 추천 위원 6명만으로 전체 회의가 이뤄지고 있다(유일한 야권 추천 위원은 거수기 역할을 반대하며 심의 중단을 선언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방심위는 이른바 ‘바이든 날리면’ 보도에 대해 무리하게 과징금을 부과했고, 방통위는 YTN을 민간 기업 유진이엔티에 매각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리고 그 유진이엔티는 이사 후보로 이명박 정부 시절 언론탄압을 하던 인물들을 포함했다. KBS도 새로운 사장이 부임하고서 끊임없이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사장은 총선에 영향을 준다며 세월호 10주기 다큐 방영을 취소하였고, 총선을 앞두고 특별감사를 진행하겠다며 감사실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감사의 독립성을 침해했다.
타협을 모르는 정치도 문제다. 의대 정원 확대와 관련된 정치적 공방만 봐도 그렇다. 전공의 파업이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안 된다고 언급하는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보라. 우리는 의사가 부족하다는 입장에 동의하며,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지만,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며 힘으로 찍어 누르는 정부의 행태 역시 반대한다.
이와 같이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를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 계속해서 특정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를 만들어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며, 타협이 아니라 상대를 배제하는 정치를 일삼는다. 그 결과, 공적 담론의 공간이 시민들이 참여해 대안을 모색하고 논의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 앞에서 정치적 쇼를 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정치 및 정책과 관련된 공적 담론의 장이 활짝 열리는 총선 정국이 진행되고 있으나 여야를 막론하는 공천 파동이나 이합집산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안타깝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의대 정원 이슈를 제외하면 거대 양당 모두 정치적 철학이나 비전, 관점, 의제, 정책 같은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공적 담론 공간을 위축시키는 정치 풍토 자체를 문제 삼고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문제에서 출발하자면, 일차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복수의 관점을 지켜내는 것이 되겠다. 공적 담론의 공간은 관점, 가치의 복수성이라는 조건 아래 형성된다.
덧붙여 열린 토의와 타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판단을 중시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싶다. 일본의 정치철학자 사이토 준이치는 토의에 대해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임과 동시에 불합의가 새롭게 창출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토의에서 합의를 산출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논의의 계속(재심 가능성)을 보증하는 절차를 유지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타자의 입장에 서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적인 사고의 폭이, 우리의 판단에 그만큼의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말했다.(<민주적 공공성>,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이음 펴냄)
이런 지향과 태도를 견지하는 정치 풍토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으로서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먼저,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억압하려는 목소리에 관심 가지고 분노하며 연대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설득과 대화, 타협을 거부하는 모든 정치를 거부해야 한다. 현실 정치에서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발언과 행태는 일시적으로 시원함을 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은 낙관적이지 않다. 담론 공간을 위축시키는 정부와 정치권의 행태가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에 대한 냉소가 다시 소통과 논의의 공간을 줄이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총선을 앞두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정치적·정책적 담론의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쇼에 냉소를 보내고, 각각의 영역에서 정치권이 다양한 비전과 관점, 의제, 정책을 내놓도록 요구하고 토론하자. 또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한 비전과 대안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주장하자.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사실 민주주의는 사회권력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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