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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없이, 작업비는 25년째 그대로” 출판계 무법지대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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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빙이미지크리에이터를 통해 생성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30대 한국 여성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모습'. 
▲AI 빙이미지크리에이터를 통해 생성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30대 한국 여성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모습’. 

국내 책 생산의 상당수를 맡는 출판 외주노동자들이 절반 꼴로 계약서 없이 일하는 것으로 정부 용역연구 결과 나타났다. 외주노동자들은 업계 관행이란 이름으로 저임금·불안정·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연구진은 최소한의 개선안으로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하고 당사자를 포함하는 협의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은 케이스탯컨설팅의 용역연구로 진행한 ‘출판 외주노동자 근로환경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연구’ 보고서를 이달 초 발행했다. 연구진은 지난해 9월26일~11월6일 출판 외주노동자 459명에 대해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으며 20명은 면접조사를 진행했다. △기획자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번역가 △글작가 △그림작가 등 7개 직군을 조사했다. 출판진흥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출판업계는 외주노동자의 노동 없이 돌아가지 않지만 공식 통계에선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지난해 발행된 출판진흥원의 ‘2022년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신간 도서 1권 기준 외주의뢰 비율이 33%에 달했다. 전국 887개 출판사 가운데 직원이 5인 미만인 곳이 69%에 달한다. 연구진은 “이는 출판사가 외주노동자 없이 책 생산이 불가능함을 의미하고, 사업주는 외주노동자가 있어 고용을 늘릴 필요성을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며 “실제 출판산업 생태계에 대한 논의나 정책을 살펴보면 엄연히 보여야 할 ‘외주노동자’의 문제가 삭제돼 있다”고 했다.

출판 외주노동자들은 수행한 계약(1인 평균 12.6건) 가운데 48%는 구두 계약하거나 계약서를 생략했다고 밝혔다. 서면 계약한 경우는 52%였다. 연구팀은 계약서 미작성 실태에 “형편없는 단가, 임금체불과 같은 부당하고 불합리한 출판계 관행이 유지되는 중요한 요소”라며 “계약서를 작성한다 해도 업체가 제시한 것을 확인하고 서명하는 정도이고, 외주노동자가 제시한 조건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계약서 작성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했다.

▲언론노조는 지난해 9월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출협에 산별교섭을 요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언론노조는 지난해 9월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언론노조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출협에 산별교섭을 요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25년 전부터 교정비 한 번 안 올라, 알음알음 일감 구해야 하니 알아서…”

출판 외주노동엔 ‘불안정한 일감’과 ‘턱없이 낮은 단가’가 ‘업계 관행’이란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응답자 중 1년 총 보수가 3000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가 절반을 넘어섰다(52.4%). 이 중 ’200만원 미만’인 경우도 15.5%나 됐다. 단가는 출판사 기준이나 업계 관행에 따른다는 답변이 대부분(‘매우 그렇다=5점’ 기준 평균 4점)이었다. 자주 겪는 부당한 경험으로는 ‘터무니없는 단가 제시(3.22점)’가 가장 많이 꼽혔다.

25년 넘게 프리랜서 편집기획자로 일한 A씨는 면접 조사에서 교정비가 25년 전에 비해 조금도 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A씨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정비 한 번도 안 올랐다. 25년 전 장당 500원이었는데 지금도 500, 600원 받는다”며 “알음알음 관계(로 일감을 구하)기 때문에 분명히 나는 이 가격을 받아야 함에도 알아서 적게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가 B씨는 “작년에 일을 거의 쉬지 않고 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올해 5월에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니까 수입이 770만 원이더라.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편집자 C씨도 “그 100원이 그렇게 안 오른다”며 “단가는 거의 오르지 않는다고 봐야 될 것”이라고 했다. 연구진은 동화작가의 경우 중간업체인 기획사의 청탁을 받고 전집을 작업하는데, 판매 부수와 무관하게 최초 인세만 지급 받아 낮게는 50만 원만 받는다고 전했다.

‘프리랜서’란 이름이 무색한 장시간 과로 환경도 확인됐다. 한 달 평균 작업 기간이 20일 이상이라 답한 응답자가 36%에 달했다. 이 중 25일 이상은 17%였다. 5~10일 미만이라는 응답은 26%였다. 응답자들은 외주노동자 작업 강도가 강한 원인으로 △낮은 작업비로 인해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 △촉박한 일정 △작업물 완성도 유지를 가장 많이 꼽았다. 작업비 체불도 비일비재해 1인 평균 4회 ‘지급 지연’을 겪었다.

번역가 D씨는 자궁근종 수술을 받게 돼 회사에 알렸지만 입원 중에도 마감 독촉 전화를 받고, 걷지 못하는 상황에 혈액통을 달고 울면서 마감을 한 경험을 털어놨다. D씨는 “그렇게 작업해서 넘긴 책은 1년 후에 나왔다”고 했다.

면접 응답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했다고 입 모았다. D씨는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우울증이 없는 분들이 없다. 기본적으로 고립돼 일하기 때문에 우울증이 없을 수가 없다. 노동 강도나 그리고 저희의 적은 페이나 이런 걸 생각하면 우울할 수밖에 없다. 시력 저하나 손가락 염좌도 흔하다”고 했다. 기획편집자 E씨도 “업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솔직히 건강이다. 출판은 정신적 육체적 노동 강도가 너무 강하다. 출간일까지 거의 밤샘”이라고 했다.

연구진은 시급한 개선안으로 단가 현실화와 표준계약서 마련을 꼽았다. 연구진은 “광범위한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표준작업시간을 설계하고 표준임금을 산출해야 하며, 이해당사자 간의 협의를 통해 생활임금이 가능한 수준에서 단가를 설정해야 한다”며 “신속히 표준계약서를 제정하고 사용의 의무화를 통해 권리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응답자의 88%가 표준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당사자들이 의견을 수렴할 노사정 상설 협의체도 권고했다. 연구진은 “출판 외주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구나 협의체 등을 통해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 및 정책 참여 경로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노사정 상설협의체가 이해당사자 의견 수렴 및 정책 심의기구이자 정책 전달체계로서 기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안명희 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은 “출판노조협의회는 문체부에 노사정 협의체 구성을 계속 요구해 왔지만 정부는 사실상 회피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보고서로 외주 출판노동자의 노동실태를 확인했으니 이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교섭을 다시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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