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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책임 더 엄히 물었지만…기업들, 피해자 배상 외면

연합뉴스 조회수  

무죄 선고한 1심 선고에 학계 반발 쏟아져…결국 2심 ‘유죄’

기업들, 차일피일 책임만 미뤄…”낸 분담금 돌려달라” 소송까지

눈물 훔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눈물 훔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서울=연합뉴스) 이재영 기자 = 유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의 죄를 인정한 법원 판결이 11일 나왔다.

이는 사실상 모든 가습기살균제 원료에 대해 ‘폐 질환과 인과성’을 인정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법원은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업체의 책임을 더 엄하게 물었지만, 기업들은 피해자 배상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어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무죄 선고한 1심 선고 후 학계 반발 쏟아져…결국 ‘유죄’

서울고법 형사5부는 이날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74)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65)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을 원료로 하는 가습기살균제 ‘홈크리닉가습기메이트’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데 관여한 혐의를 받는다.

앞서 2021년 1심 재판부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 뒤집힌 것이다.

1심 재판부는 가습기살균제에 포함된 CMIT/MIT 양이 폐 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만큼 위해성이 있는지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CMIT/MIT가 폐 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만한 물질인지, 흡입으로 폐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폐에 도달해 폐 질환이나 천식을 일으킬 만큼 축적될 수 있는지도 입증되지 않은 것으로 봤다.

이런 판단은 학계의 큰 반발을 불렀다.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보건환경학과 교수 등은 2021년 환경보건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재판부는 CMIT/MIT가 수용성 물질이어서 하기도(下氣道)에 도달하기 어렵고 폐 질환과 천식을 초래할 가능성이 작다고 했으나, 수용성과 반응성이 높은 물질도 하기도 질환을 초래한 사례가 많은 점과 CMIT/MIT를 취급하는 노동자 천식 사례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재작년 국립환경과학원·경북대·안전성평가연구소 연구진도 CMIT/MIT와 폐 질환의 연관성을 정량적으로 입증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연관성이 없다는 법원 판단은 재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진은 ‘과학적 증거와 인과관계 판단 기준 연구’ 보고서에서 “1심 재판부는 과학적 증거의 증명력을 판단하는 데 있어 과학계 경험칙이 아닌 일반적 경험칙에 의존했다”고 비판했다.

2심 재판부 판단은 이러한 쏟아지는 비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심 재판부는 “전문가들 연구를 고려하면 CMIT/MIT가 폐 질환 또는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 간 구체적 인과관계의 신빙성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사실상 장기간에 걸쳐 전 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이라며 “불특정 다수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 피해자는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존엄성을 침해당했다”고 질타했다.

가습기살균제 2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 연 피해자들
가습기살균제 2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 연 피해자들

(서울=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 법원 판결은 더 엄해졌지만…기업들, 차일피일 책임만 미뤄

현재까지 정부가 인정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5천667명 가운데 홈크리닉가습기메이트 사용자(다른 살균제와 복수 사용 포함)는 28.8%인 1천633명으로, 제품별로 따졌을 때 두 번째로 많다.

피해자가 가장 많은 가습기살균제는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으로 4천748명에 달한다.

옥시 가습기살균제는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로 제조됐는데, 이 물질과 폐 질환 간 인과관계는 2018년 1월 신현우 옥시 전 대표가 대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을 확정받으면서 법적으로 완전히 인정됐다.

이날 기업의 책임을 더 엄하게 물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2011년 불거진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해결’이 가까워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재작년 4월 민간기구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이 무산된 뒤 해결을 위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한 차례 공청회가 열린 것을 제외하고는, 총선 준비로 분주한 정치권에서도 뚜렷한 행동에 나설 조짐이 없다.

다만 이번 판결로 SK케미칼 등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 생산자가 더 책임져야 한다는 옥시와 애경 등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는 있다.

SK케미칼이 법정에서 가습기살균제 관련 책임을 본격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조정위가 제시한 조정안을 수용하면 피해자 구제급여(최대 9천240억원)의 54%와 7.4%를 각각 부담해야 했던 옥시와 애경은 ‘원료물질 사업자’의 추가 분담을 요구하며 조정안을 거부한 바 있다.

SK케미칼은 옥시보다 훨씬 낮은 17.1%의 부담을 적용받았다.

지난해 옥시는 ‘앞으로는 분담금을 낼 수 없다’라고 환경부에 통보했고, 애경산업은 낸 분담금을 돌려달라며 행정소송까지 제기했다.

기업들은 문제의 ‘종국적 해결’도 요구한다.

조정안 등으로 합의가 이뤄지면 미래에 발생하는 피해까지 포함해 문제가 완전히 정리되는 ‘종국성’을 보장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법 원칙에 안 맞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령 교통사고 후 가해자가 합의해 피해자가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했더라도, 합의 시 예측 못한 손해가 추후 발생하면 그에 대해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은 피해자 중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2천명에 육박하지만, 기업들이 차일피일 책임을 미루면서 그 해결은 ‘요원’한 실정이다.

jylee24@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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