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역 쪽방촌 초입서 주민·노숙인 진료…주 2∼4차례 집집 방문
고영초 원장 “병원 못오는 이들 위해 방문…사회 보탬 끊임없이 고민”
(서울=연합뉴스) 계승현 기자 = “야 삼식아, 죽었니 살았니. 밥은 먹었니? 선생님들 모시고 왔어. 다리 썩어서 아프다며. 문 좀 열어봐.”
지난 4일 서울 영등포역 쪽방촌의 A씨 집 앞에서 쪽방촌 이웃 안광숙(70)씨가 소리를 쳤다. 영등포역 주변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의 건강을 보살피는 인근 요셉의원 고영초 원장을 비롯한 간호팀이 함께 찾아왔다.
쪽방촌에 수년간 살면서 쪽방 간 이사만 4번 했다는 안씨는 스스로를 이 일대의 ‘터줏대감’이라고 소개했다. 이날도 ‘삼식이’라고 불리는 A씨가 발이 썩어가 걷지 못한다는 안씨 얘기에 간호팀이 찾아온 것이다.
요셉의원은 쪽방촌 초입에 있어 멀지 않지만 A씨는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찾아오지 않는다. 의원에서 도시락과 반찬을 가져다줘도 문틈 사이로만 받은 뒤 바로 사라진다. 세상과 통하는 마음의 문을 닫은 전형적인 은둔형 외톨이인 셈이다.
간호팀은 A씨와 친분이 있는 안씨를 대동하고서야 A씨와 소통하는 데 성공했다. 안씨가 “너 죽었나 싶어서 선생님들 모시고 왔어”라며 익살을 부리자 A씨는 그제야 문을 열고 간호팀에게 당뇨 합병증으로 발 괴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간호팀의 설득 끝에 조만간 의원을 찾아 정식 진료를 받기로 약속했다.
쪽방 보도에 있는 공용화장실에 가다가 넘어져 무릎과 목을 다쳤다는 박모(73)씨도 이날 방문진료 대상이었다.
박씨의 쪽방은 체구가 작은 여성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은 공용현관문을 통과해, 책가방을 메고 서면 꽉 찰만한 폭의 복도를 굽이굽이 따라 들어가서야 찾을 수 있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담배 냄새와 곰팡내가 코를 자극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이부자리와 작은 냉장고, 밥솥, 텔레비전만으로 방이 가득 찼다. 고 원장이 문을 열고 들어가 청진기와 혈당체크기 등 의료장비를 방 한쪽에 놓자 더 이상의 사람이 발 디딜 틈은 없었다.
박씨는 고 원장을 보자마자 “원장님, 너무 아파요. 어제 화장실 갔다가…여기…넘어져서 파스 붙였어요…”라고 호소했다.
고 원장은 깡마른 박씨의 무릎과 팔목을 진찰하며 곳곳에 파스를 붙여주고 방 안에 널브러져 있는 약봉지의 성분을 확인한 뒤 “더 안 아픈 약으로 처방해서 가져다주겠다”고 말했다.
쪽방촌 주민 대다수는 고령자라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관절염 등 만성 질환을 지니고 산다. 추위에 외출이 더 어려워지는 겨울철에는 빨리 손을 써야 하는 증상이 나타나도 좀처럼 병원을 찾지 않기 때문에 병세는 날로 악화한다.
이런 환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요셉의원의 방문 간호팀은 한겨울에도 주 2∼4차례 쪽방촌 일대를 집집이 돌며 주민의 건강 상태를 직접 확인하고 도시락을 건넨다. 간호팀과 안면을 튼 일부 주민은 치료가 필요한 다른 주민의 상태를 알려주기도 한다.
쪽방촌 주민들에게 요셉의원은 한 줄기 빛이다. 80대 주민 B씨는 자신을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말하며 “퇴행성 관절염까지 와서 시장에 못 가는데 이렇게 의원에서 도시락을 갖다주면 맨밥을 안 먹어도 돼서 좋다”며 웃었다.
요셉의원은 1987년 8월 서울 관악구 신림1동에 설립된 이후 1997년 영등포역 쪽방촌 초입으로 이전했다. 내과, 안과 이비인후과, 재활정형외과, 치과, 정신건강의학과 등의 진료과목 14개를 개설해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이 의원은 오전에 문을 여는 다른 병원과 달리 오후 1시부터 진료를 시작해 오후 8시께 마지막 진료를 마친다. 밤에 술을 먹고 늦게 일어나는 쪽방촌 주민들의 생활 리듬에 맞춘 일정이자, 봉사하러 오는 의사들이 개인 병원 진료를 마치고도 무료 진료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고 원장은 “여기 오는 환자들은 그나마 나은데 못 오는 환자들이 가장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지난해 방문 진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셉의원에서 50년 넘게 꾸준히 의료봉사를 하다가 2018년 건국대 신경외과 교수직에서 퇴임한 뒤 작년 3월 원장이 됐다.
고 원장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뭘요. 살면서 가장 하고싶었던 일이에요”라고 답하며 마스크 너머로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의사면허를 취득한 뒤부터 어떻게 하면 내 능력이 사회에 보탬이 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면서도 “나보다도 여기 오는 다른 의사, 간호사들의 마음이 참 선하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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