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안으로 페스트균이 주입된 중국인은 고통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양팔로 허공을 쥐어 뜯으며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이 빈사(瀕死)의 절규에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감옥 건물 바깥으로 끌어내 영하 20도 이하로 인공적으로 바람을 날려 맨손을 얼렸다. 그런 다음 작은 몽둥이로 동상에 걸린 손을 작은 널빤지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날 때까지 계속 두드렸다”(일본 아카하타신문 편집국, <우리는 가해자입니다>, 정한책방, 2017, 78쪽).
위에 옮긴 글은 731부대의 연구원이었다가 붙잡혀 중국 법원에 기소된 우에다 야타로의 자필 공술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일본이 찾아낸 침략과 식민지배의 기록’이란 부제목을 단 책에 실려 있다(원제목은 語り繼ぐ日本の侵略と植民地支配, 新日本出版社, 2016). 페스트에 걸려 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비명 소리는 처절했을 것이다. 14세기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神曲)에 나오는 지옥이 실제로 있다면, 731부대의 생체실험실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부러 동상에 걸리도록 한 손을 몽둥이로 내려쳤다니 왜 그랬을까. 추위에 오랜 시간 노출돼 얼어붙어 감각이 무뎌진 손이나 발이 완전히 동결됐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위 글에선 ‘작은 몽둥이로 두드렸다’고 했지만, 다른 731부대원들은 각목으로 내리치는 야만적인 짓을 서슴지 않았다. 만주 벌판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동상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 동상 치료법을 찾는다는 연구 의욕이 너무 강한 나머지, 수감자를 생체실험의 제물로 삼고 연구윤리를 어겼다는 죄책감일랑 아예 마비됐거나 일찌감치 안드로메다로 날려 보낸 것일까.
자위대 731기에 올라탄 극우 총리
이렇듯 731부대는 ‘죽음의 부대’이자 ‘악마의 부대’였다. 지난 주 글에서 ‘731부대가 뭔가요?’라고 묻는 야당의원 질문에 ‘항일 독립군인가요?’라고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되물은 이야기를 짚어 봤었다. 많은 국민들을 그야말로 어이없게 만든 문답이었다. 항일 투사들을 붙잡아 생체 실험했던 731부대를 항일 독립군과 헷갈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경제학박사에 서울대총장을 지낸 한 나라의 총리가 일본의 전쟁범죄로 비롯된 동아시아의 아픈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오늘 글은 한국 총리가 아니라 일본 총리 이야기로 시작한다. 2013년 5월1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당시 총리는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인 미야기현 히가시마쓰시마(東松島)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했다. 그곳엔 일본의 주요 행사 때마다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면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던 ‘블루 임펄스’ 비행단이 있었다(정식 명칭은 일본 자위대 제4항공단비행군 제11비행대, 1960년 창설). 아베는 곡예비행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 오른 손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리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조종석 바깥 동체에는 ‘Leader S. ABE'(지도자 아베)라는 영문 글자가 새겨져 눈길을 끌었다.
논란의 초점은 그가 탄 훈련기에 매겨진 번호 731에 있었다. 붉은 색깔의 일장기 바로 옆에 쓰인 커다란 숫자는 다름 아닌 731이었다.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731이란 숫자가 지닌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더구나 지난날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고통을 겪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겐 각별한 의미로 다가 온다. 일본의 극악한 전쟁범죄를 가리키는 상징적 숫자가 731이다.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악마의 숫자’다. 그런 731을 아베 총리는 모르고 탔을까. 마치 정운찬 전 총리가 731부대를 잘 몰랐듯이 말이다.
몸속에 흐르는 일제 군국주의의 피
지난 2022년 7월 자민당 선거유세 중에 사제권총 두 방을 맞고 죽은 아베의 몸속엔 일제 군국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다. 전쟁범죄자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전 총리는 그의 외할아버지다. 기시는 괴뢰 만주국의 경제를 주무르면서 ‘명석하지만 매우 악랄한 인물’로 알려졌다. 도조 히데키 전시내각의 상공대신과 군수성 차관으로 일제 침략전쟁의 실무자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1945년 패전 뒤 전쟁범죄 혐의로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도조 히데키 등 A급 도쿄전범재판에 이은 제2차 전범재판을 기다리다가, 1948년 12월 맥아더 장군의 크리스마스 특사로 풀려났다(연재 7 참조 바람).
생각이 깊은 동아시아 사람들이라면, 731기에 올라타 ‘엄지 척’을 하는 아베를 보면서 그의 외할아버지 망령이 아베를 덮씌운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본 자위대 곡예비행단인 ‘블루 임펄스’에는 730기, 731기, 804기, 805기 등을 비롯해 모두 8대의 곡예용 비행기가 있었다. 그런데 아베가 탑승한 것이 하필이면 731기였다. 논란이 커지자, 일본 총리실에선 ‘총리가 731기를 탄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라며 불끄기에 바빴다.
우연이라고? 조종석 바깥 동체에 ‘Leader S. ABE'(지도자 아베)라는 영문 글자까지 미리 새겨 놓고 준비를 했는데 정말로 우연일까. ‘악마의 731부대’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노린 것이 아니고? 731을 기억하는 동아시아 사람들을 겨냥한 도발이 아니고? 우연이라기보다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의구심은 그 즈음의 아베 행적으로 미뤄볼 때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베 총리는 바로 그보다 1주일 앞서 201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도쿄돔 야구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때 아베가 입었던 유니폼의 등번호가 96번이었다. 96도 그냥 우연히 96이 아니었다. 일본 평화헌법 96조를 고치려는 나름의 계산된 정치적 주장을 담은 숫자였다(바로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사정을 알고 보면, ‘Leader S. ABE’라는 영문 글자를 새겨 넣은 731기 탑승도 계산된 행동이지 우연이고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평화헌법 고치려 등번호 96달고 야구장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45년 패전 뒤 만들어진 일본의 헌법은 전쟁과 군대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헌법’이라 일컬어진다. 평화헌법 9조는 ‘군대 미보유, 교전권 불허’ 규정을 못 박아 놓았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지난날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맹주로 아시아를 호령한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평화헌법을 뜯어고쳐 제대로 된 군대를 갖고 지난날 군국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문제는 그 길로 가려는 길목의 첫 번째 걸림돌이 헌법 96조다.
이 조항에 따르면, 일본 양원(중의원과 참의원)에서 3분의 2 이상 찬성이 있어야 개정이 가능하다. 그런 다음에도 국민투표를 거쳐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다행히도, 여러 여론조사로는 아직까진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평화헌법 개정에 부정적이다). 극우의 우두머리 아베는 96조의 ‘3분의 2’ 조항을 과반수로 고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서 평화헌법을 뜯어고쳐 (자위대가 아닌) 정식 군대를 보유하고 (침략)전쟁도 벌일 수 있는 날을 앞당기고 싶어 했다.
도쿄돔 야구장의 등번호 96은 바로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아베는 “내가 96대 일본 총리니까 96번 달고 왔다”고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그의 진짜 속셈을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7일 뒤 731기 탑승 사건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에어쇼를 하는 항공기에 떡하니 그 숫자를 그려놓은 일본 자위대도 문제가 있다. 그런 731 숫자가 매겨진 비행기를 타는 아베에 더 큰 문제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악마의 731부대’의 명예회복을 노린 극우 아베의 1인 정치 쇼였다고. 숫자가 지닌 민감한 정치적 의미를 잘 알고 있던, 그리고 ‘외할아버지 기시를 빼닮아 너무 영리한 나머지 교활하다’는 소릴 듣곤 했던 아베가 정말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찔렀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을 기억하는 미국인들도 아베의 731기 탑승을 불편해했다. ‘아베 총리의 사진은 독일 총리가 재미 삼아 나치 친위대 유니폼을 입은 것과 같다’며 비판을 받았다. 제니퍼 린드(다트머스대, 동아시아지역학)는 아베의 그런 모습이 ‘의도적으로, 지독하게 도발적’이라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 맥스 피셔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린드 교수는 백번 양보해서,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문제라 했다. ‘일본 지도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제국 시대의 생물실험이란 어두운 기억 되살리다’라는 제목을 단 <워싱턴포스트> 기사(2013년 5월18일)에서 린드의 비판을 옮겨본다.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인식과 민감성이 모자라고, 아울러 일본의 이웃 국가들과 지난날 피해자들의 감정에 대한 인식과 민감성이 모자란다는 것을 보여준다(such a clear lack of awareness and lack of sensitivity about Japan’s past atrocities, and about the feelings of Japan’s neighbors and past victims)(Max Fisher, Japanese leader revives dark memories of imperial-era biological experiments in China,
위 인용문을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린드 교수는 나아가 “(아베의 731기 탑승) 사진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을 불타는 꼬챙이로 찔러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질타했다. 지난날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고통받았던 이웃나라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배려를 했다면, 다시 말해 피로 얼룩진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뉘우쳤다면, 이런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젠 96번 등번호나 731기 필요 없다”
아베가 731기를 타고 ‘엄지 척’을 한 것은 731부대 소속 의사들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도발적인 태도로 비쳐진다. 그로 말미암아 논란이 일면, 일본 보수 유권자 층의 결집을 다지는 기회로 삼는다는 교활한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평화헌법을 고치는 쪽으로 밀어붙인다는 주판알을 튕겼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대목. 2022년 7월에 죽은 아베는 극우 정치인으로서 그가 맡은 임무를 다하고 갔다. 일본 자위대로 하여금 ‘집단적 자위권’을 내세워 유사시 해외 파병을 법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고 난 뒤에 죽었다.
아베가 96번 등번호를 달거나 731기 탑승으로 논란을 일으키던 2013년 무렵만 해도, 일본은 평화헌법에 묶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사실상의 해외파병)를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헌법위반’이라는 것이 (한국의 법제처와 같은 기구인) 일본 내각법제국의 공식 해석이었다. 일본 자위대는 이른바 ‘전수방위'(專守防衛, 일본이 공격받을 때만 최소한의 자위력 행사)에 머물러야 했다.
논란을 불렀던 731기 탑승 바로 다음 해에 아베는 기어코 일을 벌였다. 일본의 보수 우경화 흐름을 타고 2014년 7월 아베는 일종의 ‘헌법 쿠데타’를 감행했다. 국회가 폐회중일 때 아베 내각은 각의(閣議) 결정으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2015년 9월 안보관련법(안보법제)이 제정됐다. 이로써 사실상 평화헌법 제9조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연재 28 참조 바람).
2016년 8월 아베가 가까이 지내던 한 언론인에게 “큰 소리로 얘기할 순 없지만, 개헌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우치다 마사토시,「아베 개헌을 독려한 아미티지 리포트」<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메디치, 2022, 534쪽 참조). 같은 맥락에서, 이즈음 일본 극우들은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됐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린다.
일본 최대 규모의 우파 모임인 ‘일본회의’로 뭉친 극우 정치인들은 죽은 아베에 큰 고마움을 느끼며 그리워한다. 언제라도 해외 파병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군국주의의 길을 닦아놓고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이들이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들을 옮기자면, 이렇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굳이 번거롭게 96번 등번호를 매긴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 가거나 731기에 올라타 시끄러운 소릴 듣지 않아도 된다. 일본은 언제라도 파병을 할 수 있고 전쟁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모두 우리의 영웅인 아베님 덕이다. 총기 테러로 죽었으니 전사한 거나 마찬가지다. 아베의 혼령을 (731부대원들처럼) 야스쿠니 군신으로 모셔야 한다.”
독일과 일본의 차이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죽은 731부대원들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군신(軍神)으로 대접받고 있다.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는 731부대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731부대가 생체실험이나 세균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부대가 있긴 있었지요. 방역급수(防疫給水), 다시 말해서 전염병을 예방하고 병사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부대였지요”라는 투로 진실과 마주 하길 피해왔다(731부대의 출발이 1936년의 관동군 방역급수부였다).
일본 의학계의 주류도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시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2009년 소수의 양심적인 의사들이 모여 만든 단체들(지난주 글에서 살펴봤던 ‘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위원회’ 등)은 아주 예외적이다. 이들은 일본의학회 차원에서 731부대의 죄악상을 스스로 검증하고 반성하자는 목소리를 내왔지만, 일본 주류 의학계는 들은 척 하지 않는다. 이는 독일 의학계가 나치 의사들의 범죄를 시인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독일의사회는 일찍이 1949년 9월 ‘인류에 대한 모든 죄 및 인류에 대한 전쟁범죄에 가담한 모든 독일인 의사를 질책하는 결의문’을 내놓았다. 나치 정권에 협력해 강제수용소에서 생체실험을 하는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을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매춘'(賣春) 행위에 견주면서 머리를 숙였다. 독일의사회가 발표한 결의문의 내용을 보자.
[우리는 독일의학이 (나치 정권 아래서) 의학의 도덕적 전통을 파괴하고 의학 명예의 질적 저하를 낳고 전쟁 및 정치적 원한을 위해 의학을 매춘적으로 사용했던 사실을 인정한다. 우리는 앞으로 독일인 의사가 그렇게 의학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노력할 것을 의학계 및 전세계에 엄숙히 맹세한다](전쟁과 의료윤리 검증추진회, <731부대와 의사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4, 101-102쪽).
1945년 패전 뒤 많은 독일 사람들은 전시에서의 언론통제로 잘 모르고 있던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나치의 전쟁범죄 실상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들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지지를 보냈던 정치인 히틀러에 대해 품었던 환상도 걷어냈다. 독일인들이 져야 할 집단적 죄와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됐다. 그런 반성적 흐름이 오늘의 독일과 일본을 가르는 큰 차이일 듯하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사 반성은커녕 핵폭탄을 두 방 맞았다는 ‘피해자 의식’을 더 내세우는 모습이다.
피고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무죄’라 주장
독일의사회의 이런 반성적 태도는 (지난주에 살펴본)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을 거치면서 나왔다. 1947년 8월19일 뉘른베르크 의사재판은 히틀러의 주치의를 비롯한 피고인 7명에게 교수형, 9명은 장기 징역형을 내렸다. 그 재판에서 피고석에 섰던 나치 의사들이 스스로의 죄를 시인하고 순순히 형량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아니다.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신들이 ‘무죄’라 주장했다. 이들은 ‘인체실험을 정당화 또는 불법화할 수 있는 보편인 기준이나 원리가 국제사회에 세워져 있느냐’고 되물으면서,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인체실험으로 희생시킨 범죄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억지를 부렸다. 이들은 ‘인체실험을 거부한다는 죄수들의 명백한 진술이 없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든 유효한 동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우겼다. 김옥주·황상익(서울대 의대 의사학교실) 두 연구자의 글을 참고로, 나치 의사들의 법정 주장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범죄자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례이다. △인체실험 대상자는 군 지휘관이 선정하거나 죄수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인체실험에 관련된 독일의사들은 단지 독일법을 따랐을 뿐이다. △만일 의사들이 연구를 거부했다면 목숨이 위태롭거나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인체실험을 결정했고 의사들은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인체실험에 관해 보편적인 윤리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체실험 없이는 과학과 의학이 발전할 수 없다](김옥주·황상익,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윤리의 발전’, 「뉴래디컬리뷰」2005년 12월).
나치 의사 피고인들은 ‘인체실험에 동원된 죄수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라면서 ‘인체실험에 사형수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그들을 계속 살아 있게 해주고 처형을 뒤로 미뤄 준다’는 궤변을 내놓았다. 나치 의사들이 곧 죽을 피실험자의 이익을 위해 자선을 베풀었다는 말일까. 한 나치 의사는 심지어 ‘인체실험 없이는 과학과 의학이 발전할 수 없다’는 듣기 민망한 말까지 늘어놓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을 타고 독자들이 그 법정으로 가볼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억지 자기변호에 매달리는 나치 의사들의 민망한 모습을 보면서 ‘짐승도 아니고 인간이 저럴 수 있는가’ 하는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나치 의사들은 독일과 폴란드에 있던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여러 종류의 생체실험을 하면서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2명의 미 법의학자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은 냉동시험, 독극물 실험, 항생물질 실험, 혈액응고 실험 등 70종이 넘는 위험한 생체실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 의사들은 7000명 넘는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정치범, 소련 전쟁포로, 동성애자, 가톨릭 신부를 희생시켰다(조슈아 퍼퍼·스티븐 시나, <닥터 프랑켄슈타인>, 텍스트, 2013, 131쪽).
나치 생체실험 수법은 731부대와 같아
뉘른베르크 의사전범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실화 하나.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일부러 추위에 노출시켜 사망에 이르는 시간을 재고 거의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 소생시키는 저체온증 생체실험을 했다. 러시아로 침략한 독일 육군과 북해에 격추된 독일 공군조종사가 추운 날씨에 부딪치게 될 저체온증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산 사람을 냉동한 다음 그 시신을 해동시켜 살려내려는 시도까지 했다.
[나치 의사는 피실험자의 직장에 탐침을 넣어 창자벽에 고정시켰다. 신체온도가 25도까지 떨어지면 대부분이 의식을 잃고 격렬한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들처럼 운이 좋지 못한 일부는 재빨리 가온 실험에 투입되었다. 방금 전까지 동사할 뻔했던 희생자들은 거의 끓을 만큼 뜨거운 물에 담겨 결국 쇼크로 사망하게 되는 등 다채로운 기법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소수의 경우 따뜻한 욕조물의 열기에 점진적으로 노출된 다음에 살아나기도 했다](조슈아 퍼퍼·스티븐 시나, 130쪽).
이는 일본 731부대가 저질렀던 냉동-가열 생체실험의 방법과 똑같다. 1945년 8월9일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 때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혀 러시아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석에 선 요시후사 도아로 중좌(관동군 헌병사령부 제3과)는 법정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는 1942년 1월 관동군 헌병사령관 하라마모루 소장과 함께 731부대를 시찰하였다.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이 직접 나서서 수감자들이 갇힌 건물 안으로 이들을 데리고 갔다. 뒤늦게 죄책감을 느낀 요시후사의 증언이다.
[복도 끝으로 우회전하니 35세쯤 돼 보이는 농민인 듯한 3명의 사람들이 수갑과 족쇄를 차고 있었다. 몹시 야위었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분노에 꽉 찬 3명의 눈들은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들의 관절은 두 번째 관절부터 썩어 있었다. 이시이 시로는 ‘이것은 동상을 입은 손가락을 섭씨 50도 되는 끓는 물에 넣어 해동실험을 진행한 결과’라고 하였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166쪽).
위 글의 필자 진청민(金成民)은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하얼빈시 사회과학원 731연구소장이다.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기록을 담은 러시아 쪽 문서 등을 참고하면서 <일본군 세균전>이란 두꺼운 책(흑룡강 인민출판사, 2008. 한국어 번역본으로 973쪽 분량)을 써냈다.
가학적 사디스트들이 벌인 ‘학살 실험’
피실험자를 온갖 가학적인 생체실험 방법으로 괴롭히다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든 나치 독일의 의사들과 731부대의 일본인 의사들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었다. 침략전쟁과 의학이 ‘사악한 동맹’을 맺은 현장의 악마들이었다. 수감자들을 실험실의 생쥐 다루듯 했던 독일과 일본의 의사들은 ‘가학적인 성향의 사디스트(sadist)’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들은 과학과 사디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악마적 행태를 되풀이했다.
나치 의사들보다 일본 의사들이 더 무서운 중요 사항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페스트균이나 탄저균을 이용한 세균폭탄 개발이다. 다음에 더 살펴보겠지만, 일본 731부대의 세균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731부대의 ‘의학적 실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실험이 아니었다. 생체실험을 겪는 피실험자의 고통을 바탕으로, 세균폭탄으로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내려 했던 ‘학살 실험’이었다(이에 대해선 다음 주에 살펴봄).
일단 731부대 수감자 건물로 잡혀 들어간 사람은 여러 생체실험을 거치며 죽어서야 그곳을 벗어나 소각로로 실려 갔다. 731부대 수감자들은 죽음의 콘베이어 벨트에 묶인 불쌍한 희생자들이었다. 731부대의 일본 의사는 그 콘베이어 벨트 옆에 서서 ‘죽음의 공정’을 진행하는 악마나 다름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생명의 끈은 생각보다 질긴 편이다. 한 생체실험에서 살아남으면, 그 다음 실험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이어진 여러 가학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끝내는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내다본 수감자들끼리는 ‘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낫다’는 절망적인 눈짓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 같은 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며 종교적 구원에 대해 길게 말했지만, 731부대 철창에 갇힌 사람들에게 주어진 실존적 상황은 절망뿐이었다. 탈출구는 없었다.
다음 주엔 731부대의 수괴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가 어떤 과정을 거쳐 731부대를 조직하고 생체실험과 세균전쟁을 펼쳤는지, 이시이 개인의 이력과 그의 전쟁범죄 행태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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