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운동권 정치 수명>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주장하는 ‘민주당 86 청산론’을 지원하는 성격의 글이다. 김대중 칼럼니스트(전 조선일보 주필)는 “운동권 정치는 이제 그 기능과 수명을 다했다. 그들은 너무 오래 특권에 심취했고 유아독존에 중독됐다. 그들은 좌파의 본연인 진보·사회주의를 무시하고 권력에만 기승하려 했다. 그 청산의 칼자루를 쥐고 한국 정치의 신주류로 등장한 것이 윤석열, 한동훈이 주축이 되는 이른바 ‘검찰’”이라고 주장했다.
같은날 조선일보 사설 <김건희 특검 총선 이후 실시가 국민 과반 여론>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본지 여론조사에서 이른바 ‘김건희 특검’에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이 63%로 조사됐다. 또 한동훈 비대위원장 제안대로 ‘여야 합의로 특검 후보자를 추천하고, 수사를 내년 4월 총선이 끝난 직후 시작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55%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조선일보는 한 위원장이 ‘총선 후 특검하자’고 제안한 사실을 지난해 12월20일 보도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야당이 추진하는 김건희 특검법에 독소조항이 있다며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여야 합의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이른바 ‘조건부 수용론’을 내세웠다가 이내 철회했다. 해가 넘어가자 한 위원장은 대통령과 발맞춰 특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 입장으로 돌아섰다. 조선일보 2일자 사설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언론이 ‘한 위원장은 김건희 특검 거부 입장’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왜 한 위원장이 잠깐 주장한 ‘조건부 수용’ 입장까지 소환하며 사설을 썼을까. 사설에 단서가 있다. “특검을 실시하되, 더 공정하게 특검을 구성하고 특검 수사가 총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게 국민 다수의 뜻”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다. 새해를 맞아 많은 언론사가 진행한 다른 여론조사에선 윤 대통령이 특검법에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여론이 과반을 넘고 있다.
‘김건희 특검법’은 한 위원장의 첫 시험대다. 용산을 견제하면서 차별화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굳이 한 위원장이 수용불가로 바꿨는데 그의 입장을 살짝 틀어 톤 조절을 하는 이유는 여론의 싸늘한 시선과 대통령실의 강고한 입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설득으로 해석된다.
조선일보는 해당 사설에서 윤 대통령이 “일단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다만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도록 설명”하고 “김건희 여사 활동을 뒷받침할 제2부속실 설치, 특별감찰관 임명 등을 함께 약속하는 것도 국민 동의를 얻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특검을 수용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 내놓은 제언에 가깝다.
종합하면 한 위원장의 존재감(운동권 청산론)을 적극 드러내며, 대통령과 차별성을 만들고(특검 조건부 수용), 윤 대통령에겐 최소한의 명분을 만들어(특검 거부 대신할 조치들) 100일도 남지 않은 4월 총선을 대비하는 모습이다.
윤 대통령은 변하지 않았다. 신년사에서 “자기들만의 이권과 이념에 기반을 둔 패거리 카르텔을 반드시 타파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을 예고하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 있다. 바뀐 건 김기현 대표의 사퇴로 달라진 여당의 얼굴뿐이다.
그런데 연초 한 위원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논조는 김기현 전 대표에 대한 조선일보 평과 비교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지난해 10월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일보는 김 대표 체제를 수차례 비판했고, 당 사무총장에 친윤 인사를 임명하자 같은달 17일 <‘혹시’ 했지만 ‘역시’로 가는 국민의힘>이란 사설을 냈고 그 다음날에는 정치부 기자의 기자수첩으로 “웅크렸던 민심의 호랑이가 총선 전에도 언제든 김 대표를 덮칠 수 있다”며 김기현 퇴진론을 정면으로 언급했다.
반면 김건희 특검법이라는 첫 시험대부터 회피한 한 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다.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점을 고려해도 지면에서 한 위원장의 약점을 찾긴 어렵다. 일례로 지난해 12월29일 <비대위 인선 누구도 몰랐다…한동훈 스타일>을 보면 한 위원장이 직접 비대위원 면면을 발표하기 전까지 어떠한 언론도 미리 취재해 보도하지 못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는 내용을 보도했고, 같은날 <젊은 전문가…여권 얼굴 달라졌다>란 기사에선 한동훈 이후 여권이 젊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동훈의 정치를 더 지켜봐야겠지만 조선일보의 연말연초 보도를 보면 총선 간판을 윤석열에서 한동훈으로 바꾸는 과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지난 1일자 기사 <세대교체와 세력 다양화 여부에 한국 정치 미래 달렸다>를 봐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86정치’ 청산과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화되고 있다. 여권에선 ‘넥스트 라이트(Next Right·새로운 우파)’의 부상이 뚜렷하다”며 “1973년생인 한동훈 위원장”을 ‘넥스트 라이트’의 중심으로 거론했다.
2일자 <‘한동훈 효과’ 현실화…2030 여성 44%가 “與 총선에 도움될 것”>이란 기사에서도 조선일보와 TV조선 여론조사 결과 윤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머물고 있지만 한 위원장이 여권 지지가 약한 2030 여성으로부터 40%대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넥스트 라이트’의 경쟁자로 볼 수 있는 이준석 개혁신당(가칭) 정강정책위원장(전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는 지면에서 찾기 힘들다. 이 신문은 지난해 12월28일 그의 탈당 소식을 전하면서 쓴 사설 <이준석 탈당, 희망 줬던 ‘청년 정치’의 결말은 결국 이렇게>에서 “(이준석이) 더 성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썼다. 이후 ‘이준석’을 제목에 포함한 기사는 지난 2일자 <이준석 신당 지지율 7%…야당표 더 가져갔다> 뿐이다.
이런 가운데 한 위원장과 ‘검사정치’에 대한 지적은 조선일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한겨레 사설 <‘28일 정책실장’이 비서실장, 비대위원은 ‘반민주당’ 일색, 이게 쇄신인가>(지난해 12월30일), <‘막말’ 민 경우, 부실검증에 끝까지 밀어붙이던 한동훈>(1월1일), <대통령에게 ‘패소할 결심’ 법무부, 부끄럽지 않은가>(1월1일), <현직 검사들 잇따른 출마, 위험수위 이른 ‘검찰 정치화’>(1월2일) 등과 대조적이다.
지난 1일자 한겨레는 <한동훈의 비밀주의가 인사 실패로>란 기사에서 민경우 비대위원이 막말로 임명 하루 만에 사퇴한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가 기밀을 잘 지킨 한 위원장의 인선을 긍정 평가한 것과 정반대의 논조다. 총선 민심은 조선일보의 기대와 한겨레의 비판 사이 어느지점에서 수렴할까. 한 위원장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대는 얼마나 지속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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