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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폭격 홀로코스트’, 그냥 일어난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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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내전(1936-1939)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4월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는 느닷없는 공습을 겪었다. 독일 ‘콘도르 군단’의 융커스 52형 폭격기들이 하인켈 전투기와 함께 몰려와 250kg의 폭탄을 떨어트렸다. 그 무렵 히틀러는 스페인 공화파(인민전선)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왕당파 프랑코 장군을 도와주려 했다. 스페인 공화파를 지지했던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가 희생양이 됐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 공군은 게르니카를 마구 폭격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시점에서 공습 훈련 겸 폭탄 성능 테스트는 덤이었다. 주민 7000명 가운데 1654명이 죽었다. 그 끔찍한 소식을 들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분노의 피가 끓어올랐고, 가로 7.7m, 세로 3.5m에 이르는 대작을 파리 국제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로 내걸었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

많은 한국인들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알아도 그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그렸던 <한국에서의 학살>은 잘 모른다. 가로 2.1m, 세로 1.1m로 그림의 크기가 <게르니카>보다 작아서가 아니다. 민간인 학살을 고발하는 그 그림을 불편하게 여긴 역대 한국정부의 교과서 정책 탓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1980년대 말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에 갔다가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과 맞닥뜨리고 놀란 기억이 새롭다. 피카소가 그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었으니 충격이 더 했다. 한국에서는 2021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된 바 있기에,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가운데 가보신 이들도 많을 듯하다.)

게르니카 학살은 20세기의 새로운 전쟁 방식인 ‘공습 테러 전술’이다. 2년 4개월 뒤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서는 공습이 일반화됐고, 민간인 주거지역 대량폭격으로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이를테면, 1940년 5월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로 침공하면서 벌였던 로테르담 공습으로 4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전쟁 초반부에 런던을 비롯한 영국 도시들을 겨누었던 나치 독일공군의 잇단 공습(사망자는 6만), 전쟁 후반부에 독일 도시들을 겨눈 연합군의 파상공습은 끔찍한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사망자는 60만).

공습이 끝난 뒤 구조를 기다릴지 모를 생존자들을 찾아나선 구조대원들은 불타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처참한 모습으로 있는 시신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곤 했다. ‘독일의 피렌체’ 드레스덴의 경우도 그러했다. 1945년 2월 영미 공군의 파상공습으로 희생된 1만 8000명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불타 무너진 집 안에 갇혀있었기에, 시신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드레스덴에서 멀지 않은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연합군 포로들이 시신 발굴의 궂은일에 동원됐다. 커트 보니것은 미군 포로로 있다가 전쟁 뒤 풀려나 훗날 작가가 됐다. 그가 지난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려 한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말을 들어보자.

“그들(영미 연합군)은 도시 전체를 불태웠다. 날마다 우리는 도시로 걸어 들어가 시체들을 빼내기 위해 지하실과 대피소를 파헤쳤다. 우리가 그들의 집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은 끔찍했다. 대피소나 지하실은 마치 심장병을 앓았던 사람들로 가득 찬 전차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어 있었다. 화재폭풍(fire storm)은 놀라운 것이다. 그 폭풍은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 한가운데서 생기는 토네이도로 화재폭풍이 커진다. 그곳에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란 없다.”(Richard Rhodes, , Simon & Schuster, 1986, 593쪽)

▲ 조명 장치를 작동중인 독일의 대공 방어요원들. 압도적인 연합군 공군력에 밀려 독일은 전쟁 막판에 대공방어를 사실상 포기했다. ⓒ위키미디어

대외적으론 ‘정밀 폭격’, 실제 희생자는 민간인

‘폭격기 해리스’의 영국 폭격기사령부와 영국주둔 미 제8공군의 독일 공습에서 주요한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영국군은 (폭격기의 손실을 줄일 요량으로) 야간 폭격, 미군은 주간 폭격을 주로 맡아 해냈다. 이런 역할 분담은 1943년 1월 초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만난 영미 두 지도자(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가 만났을 때 이뤄졌다.

양국 공습의 차이는 떨어뜨리는 폭탄에도 있었다. ‘폭격기 해리스’가 이끌던 영국 폭격기사령부가 독일 도시에 소이탄을 마구 투하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 주둔 미 제8공군은 일본의 도쿄 대공습 때 썼던 소이탄(M-69 집속탄) 같은 강한 화염을 일으키는 폭탄을 독일에는 퍼붓지 않았다(M-69의 파괴력에 대해선 도쿄공습을 다룬 연재 40 참조). 그 대신에 다른 고성능 폭탄을 떨어트렸다. 아울러 철도와 같은 수송시설과 정유소 등 군사적 목표물에 대한 정밀 주간 공습을 원칙으로 삼았다.

하지만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실제로는 영국 ‘폭격기 해리스’의 공습 방식과 다를 바 없는 무차별 폭격이 이뤄졌다. 그러면서도 언론 브리핑을 통해 대외적으론 ‘정밀 폭격’을 내세웠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의 공습 목표가 ‘군사적 산업적 목표가 있는 도시’라고 했지만, 이는 ‘무차별 테러 폭격’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는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수송시설을 표적으로 했지만 진짜 희생자는 비전투원이었다. 폭격대의 지휘관은 작전 전날, (신문에 실리는 군의 발표에서는 군사목표 공습이라는 점이 강조될 것이기에) “이번 작전이 일반시민을 반복적으로 목표로 삼고 그들에게 공포를 안겨줄 의도가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고 명령했다. 실제로 테러폭격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이고 인도적인 폭격이라고 설명하는 이중 잣대가 당시 미국의 홍보가 가진 특징이었다.](아라이 신이치, <폭격의 역사>, 어문학사, 2015, 125쪽).

‘폭격기 해리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

많은 미국인은 미 정부의 언론 통제와 조작을 통해 미군이 독일 민간인 주거지역을 무차별 폭격하진 않는다고 여기게 됐다. ‘나치 히틀러가 밉지만, 그래도 우리 미군은 독일 시민을 다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폭격을 한다’고 믿었다. 이렇듯 미국의 ‘군사 목표물만을 겨눈 정밀 폭격론’은 일종의 ‘거짓 신화’처럼 미국 대중에게 자리 잡았다. 독일 현지에서 벌어지는 공습의 실상은 달랐다.

미 역사학자 로널드 샤퍼(캘리포니아주립대, 역사학)나 마크 셀든(빙햄튼대, 역사학) 같은 연구자들은 ‘미국이 겉으론 정밀폭격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상 영국의 무차별 지역 폭격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다’고 비판한다. 공습에 관한 한 미국의 지휘관들이 영국의 ‘폭격기 해리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샤퍼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심판의 날개: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폭격>에서 미군 공습이 지닌 군사적·도덕적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드레스덴 공습은 나치 강제수용소, 나치 독일의 소련군 및 미군 포로 살해, 그리고 독일의 다른 전쟁범죄 행위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유명한 쟁점(causes celebres)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onald Schaffer, ,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97쪽).

샤퍼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이 제2차 세계대전을 나치 히틀러, 그리고 일본 히로히토와 싸운 ‘선한 전쟁'(good war)으로 여긴다. 진주만 기습을 받은 미국의 안보와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이른바 정의의 전쟁(just war)이다. 또한 미국인들은 ‘미군의 공습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그 폭격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미군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이 옳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샤퍼는 그런 미국 정부의 주장에 고개를 가로 젓는다. 전쟁 초반부에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겨냥해 불필요한 민간인 살상을 막으려고 ‘정밀 폭격’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전쟁 후반부에 가서 그 원칙을 버렸던 점을 지적한다. 도시지역 폭격으로 많은 민간인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군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방공호에 피신해 있었으나 공습의 열폭풍으로 죽은 드레스덴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 ⓒ위키미디어

‘테러 폭격’을 맞았어도 ‘잊혀진 홀로코스트’

미 뉴욕주립대(SUNY)에 속하는 빙햄튼대(역사학) 교수이자 코넬대 동아시아 프로그램 수석 연구원으로서 <재팬 포커스>(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의 편집자인 마크 셀든도 위의 샤퍼와 같은 시각에서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셀든(1938년생)은 20대 청년 시절이던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어 허우적댈 때 그 전쟁의 도덕성에 강한 의문을 품고 반전운동을 폈던 이력을 지녔다. 그로부터 80대 후반 나이에 접어들기까지 셀든은 (1928년 생으로 90대 중반 나이의 노엄 촘스키를 뒤따라) 왕성한 지적 활동을 펴온 비판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잊혀진 홀로코스트'(A Forgotten Holocaust)라는 제목의 긴 글에서 셀든은 미국이 20세기와 21세기에 벌인 여러 전쟁(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에서 무차별 폭격전략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킨 미국의 전쟁방식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 셀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테러 폭격’으로 숨진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관련 부분을 옮겨본다.

[일본에서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과 같은) 훨씬 더 나쁜 상황이 닥쳤지만,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 폭격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과 의문을 불러 일으켰고, 이 도시는 미국과 영국의 테러 폭격(terror bombing)의 대명사가 되었다.](Mark Selden, A Forgotten Holocaust,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Vol. 5, 2007년 5월)

쾰른 대성당 멀쩡하니까 정밀폭격?

영국에서 드레스덴 공습 뒤 하원을 비롯한 정치권과 언론에서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 도시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습 행위를 질타했듯이(연재 49 참조), 미국에서도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 공습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셀든의 글에 따르면, 공습이 낳은 엄청난 피해도 피해려니와 그 무렵 (Associated Press)의 한 보도가 더욱 논쟁을 촉발시켰다.

는 ‘연합군 공군 사령관들은 히틀러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한 무자비한 편법으로 독일의 인구 중심지에 의도적인 테러 폭격을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폭격기 해리스’를 비롯한 공군사령관들의 결정이 잘못 됐음은 곧 드러났다. 실제로 1945년 2월의 드레스덴 공습이 히틀러의 죽음을 가져오진 않았다. 소련군이 베를린 시가전을 벌이며 히틀러 지하벙커로 바짝 다가선 시점에서야 히틀러가 자살한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1만 8000명 드레스덴 시민의 죽음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와 관련, 셀든의 글을 더 보자.

[미국 관리들은 의 보도를 흠집내기 위해 재빨리 행동했다. 미국의 폭격 뒤 멀쩡하게 남겨진 쾰른의 대성당을 미국 인류애의 상징으로 꼽으면서,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제한하는 원칙을 고수하는 미국의 태도를 되풀이했다.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은 ‘우리의 폭격 정책은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을 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고 말하며, 주요 교통 중심지인 드레스덴이 군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Mark Selden, A Forgotten Holocaust).

그 무렵 영미 연합군은 잇단 공습으로 쾰른 도시지역을 파괴했지만 쾰른 대성당은 심각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대성당(1248년 착공)이 오랜 역사를 지닌 주요 건물인데다가 랜드 마크로 공습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점도 있어 파괴대상에서 뺐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대성당은 잘못 떨어진 폭탄을 몇 개 맞긴 했다. 지난주 글에서 밝힌 드레스덴의 오랜 역사를 지닌 걸작품 <군주들의 행렬>이 용케도 공습피해를 입지 않은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미국 전시지도부는 쾰른 대성당 사례를 꼽으며 “우린 보다시피 정밀 폭격을 하고 있다”고 미 대중들에게 선전했었다. 쾰른 시민의 죽음에 대해선 물론 입을 닫았다.

▲ 독일과 일본을 겨냥한 공습 효과를 검증한 미 전략폭격조사단(USSBS) 보고서 웹사이트. 보고서는 ‘공습으로 결정적인 전쟁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적국의 저항의지 높였다’고 지적했다.

독일 폭격, 효과는 있었나

미국의 도쿄 공습을 주제로 한 글(연재 40)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쟁의 운동장이 연합국의 승리 쪽으로 기울어 가던 1944년 11월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헨리 스팀슨 전쟁장관의 지시에 따라 미 공군의 최상급자인 아놀드 장군과 (영국 주둔 미 제8항공대 사령관을 지냈던) 칼 스파츠 중장의 주도 아래 미국전략폭격조사단(USSBS)을 출범시켰다. USSBS의 임무는 공군력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평가하고, 아울러 독일과 일본을 겨냥한 공습 효과를 검증하는 보고서 작성이었다.

조사위원단 구성은 찰스 프리츠를 비롯한 사회학자, 재난전문가 등 12명의 민간인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현역 군 장성으론 오빌 앤더슨 한 명이 조사단에 있었지만, 고문으로 그의 역할은 제한됐다. 1천명 넘는 보조 인력이 투입된 USSBS는 처음엔 런던에서, 나중에는 도쿄에서 작업을 한 끝에 ‘미국전략폭격조사(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보고서를 내놓았다(보고서 http://www.ibiblio.org/hyperwar/AAF/USSBS/).

USSBS 보고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1945년 9월 30일자로 작성된 독일을 포함한 유럽지역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6년 7월1일자로 작성된 일본 보고서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관련 보고서는 208권, 일본을 포함한 태평양지역 관련 보고서는 108권으로 모두 합쳐 수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127쪽 분량의 요약본은 https://apps.dtic.mil/dtic/tr/fulltext/u2/a421958.pdf).

보고서는 독일과 일본 모두 군수시설이나 수송시설에 대한 폭격에 후한 점수를 주면서도, 도시 주거지역 폭격엔 비판적이다. 적의 전쟁의지를 꺾는 효과보다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을 지적했다. 도시의 민간 주거지역 공습은 ‘미국 민주주의’의 잣대에 비춰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도 담았다(그렇다고 공습이 ‘전쟁범죄’라는 지적은 물론 없다.).

독일을 포함한 USSBS 유럽 보고서의 경우는 일본 보고서보다는 공습 평가 부문에서 좀 더 긍정적이다. 특히 석유 산업과 전시의 주요 운송수단인 트럭 제조공장의 파괴가 연합군의 승리에 나름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석유와 윤활유 관련 시설물 공습은 독일 쪽에서도 ‘대재앙적'(catastrophic)이란 표현을 쓸 정도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트럭 제조부문에서 상위 2개 생산업체 가운데 하나인 브란덴부르크의 오펠은 1944년 8월 한 차례의 공습으로 전쟁 끝날 때까지 문을 닫았다. 한 달 뒤 다임러-벤츠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공습이 오히려 적국의 저항의지 키웠다”

USSBS 보고서에 따르면, 연합국 수송단을 위협하던 U-보트를 비롯한 잠수함 제조창도 공습으로 말미암아 파괴돼 가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공습이 독일 항공기와 장갑전투차량 생산량을 줄이는 데는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독일인의 식량 공급을 줄여 패전을 앞당기는 데에 연합군의 공습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전쟁 말기 독일은 엄격한 식량 배급제를 이어갔다. 보고서는 ‘전쟁 기간 줄곧 독일인의 식단은 영국인과 거의 같은 칼로리가 공급됐다’고 썼다.

결론 부분에서 보고서는 영미 연합군의 공습이 독일 산업시설과 교통망을 파괴하는 등 나름의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라 인정하면서도, 연합군의 공습이 1945년 독일의 전반적인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는 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공습이 승리를 가져온다”고 영국의 ‘폭격기 해리스’가 입버릇처럼 내뱉던 주장과는 어긋나는 결론이다. 보고서는 오히려 더 나쁜 측면으로, 공습으로 말미암아 ‘적국의 저항 의지를 증가시켰다’고 지적했다. 연합군의 공습이 민간인의 사기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이 죽고 낙담한 노동자들이 반드시 비생산적인 노동자로 전락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 대목은 일본 쪽도 마찬가지다.

연합국의 공습은 독일과 일본에 각기 60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USSBS 보고서의 결론대로 공습이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그동안 그토록 많은 민간인을 죽고 다치게 하는 전쟁범죄를 무릅쓸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 1942년 5월 연합군의 공습을 받는 쾰른. 쾰른대성당은 큰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주변지역은 초토화됐다. ⓒ위키미디어

‘차별 폭격’과 ‘폭탄 홀로코스트’

영국의 전쟁 연구자 존 키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어린이 사망자 20만 명을 포함한 60만 명이다(독일의 영국 공습 희생자는 6만 명). 독일 도시들은 밤낮 교대로 이어지는 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키건이 정리한 피해 상황을 보자.

[(미국과 영국의) 폭격이 독일 민간인에 끼친 손실은 비극적으로 높다.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명, 함부르크에서 적어도 5만 명, 베를린에서 4만 명, 쾰른에서 2만 명,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명, 보석 같은 바로크풍 소도시 뷔르트부르크에서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함부르크에선 여성 사망자 수가 남성 사망자 수를 많게는 40%까지, 다름슈타트에선 80%를 넘어섰다. 두 도시는 화재폭풍이 일어난 곳이다.](존 키건, <2차 세계대전>, 청어람미디어, 2007, 647-638쪽).

위 인용문에선 여성 사망자가 더 많다고 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간인 희생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성인 남성은 군대에 소집돼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사실 하나. 같은 독일 도시 지역 주민이라도 저소득층의 공습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다.

영미 연합군은 도시 지역을 폭격하면서 피해 규모를 극대화하기 위해 특히 주택 밀집지대를 노렸고, 그곳 거주민이 대부분 저소득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이는 본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도교 대공습 때의 상황과 똑같다(연재 40). 일본 언론인 요시다 도시히로는 함부르크 공습의 다수 피해자가 부유층보다는 서민과 빈곤층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차별 폭격’이라 일컫는다.

[함부르크의 상황은 이후 독일과 일본 각지의 공습 희생자에게서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공통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즉 무차별 폭격의 실체는 (공습을 받은) 시민 가운데 약자를 희생자로 만드는 ‘차별 폭격’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요시나 도시히로, <공습>, 휴머니스트, 2008, 113쪽).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나 집을 잃은 독일인은 그러나 연합군 공습의 야만성에 대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했다.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규모가 워낙 컸고, 이웃 유럽 국가에게 큰 아픔을 주었던 독일이다. 그렇기에 대놓고 ‘피해 의식’를 나타내기 어려웠다. 같은 맥락에서, 적어도 1만 8000명이 죽은 드레스덴 시민도 “비무장 민간인인 우리를 겨눈 연합국의 공습은 전쟁범죄가 아니고 뭐냐”고 항의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전후에 태어난 신세대가 독일인의 다수를 차지하면서부터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공범의식 또는 나름의 집단적 죄의식을 지녔던 세대보다는 훨씬 편하게 연합국의 전쟁범죄론을 말한다. 이런 흐름을 타고 독일의 네오 나치나 국수주의자들은 연합국의 잇단 독일 도시 공습을 일컬어 ‘폭탄 홀로코스트’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냥 일어난 일은 아니다”

그런 독일도 아시아·태평양전쟁 때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이웃 국가에게 엄청난 공습 피해를 안겨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글 맨 앞에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독일 공군이 폭격해 피카소의 분노를 불렀다는 일을 살펴봤다. 피카소 그림에서 창이 등에 꽂힌 말이 목을 쳐들고 고통스레 울부짖는 모습은 곧 공습 피해를 입은 민간인의 아픔을 뜻한다. 독일은 공습 피해국이면서도 가해국이다.

도쿄 대공습을 겪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중국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었다. 전쟁 끝 무렵인 1945년에 일본인이 겪은 잇단 도시 폭격과 막판의 원폭 피해는 그동안 벌여왔던 침략전쟁의 결과물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일본 작가 사오토메 카츠모토(早乙女勝元)도 ‘도쿄대공습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도시를 맹폭했던 미 육군 제21폭격단 커티스 르메이 사령관은 영국의 ‘폭격기 해리스’를 판박이처럼 닮은 인물이다. 그런 르메이의 전쟁범죄를 카츠모토는 <도쿄대공습>(岩波新書, 1971)에서 앞장서 고발했었다(연재 40 참조). 카츠모토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충칭(重慶)에서 저질렀던 공습 전쟁범죄의 실상을 거듭된 현지답사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뿌리를 거슬러 가보면, 발단은 일본의 중국침략이다. (도쿄대공습 이전에) 난징대학살이나 충칭 폭격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10만 명이 희생된 도쿄 대공습은 우연히 일어난 나쁜 일이 아니라, 사실은 ’15년 전쟁'(1931년 만주침략 뒤 1945년까지의 전쟁)이 가져온 결과이다. 나는 도쿄대공습의 폭거를 (전쟁범죄로) 고발하는 사람이지만, 중요한 것은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早乙女勝元, <重慶からの手紙>, 草の根出版会, 1989, 129쪽).

위의 가츠모토는 미국의 공습 전쟁범죄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아울러 일본이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고 여기는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냉엄한 반성 없이는 일본이 언젠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일본의 극우화 움직임을 보면, 그의 걱정이 지나친 것만은 아니다. 서구의 네오 나치들이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없었다’ 또는 ‘유대인들은 죽을죄를 지었기에 죽은 것뿐’이라 우기듯이, 일본의 극우들도 ‘난징 학살은 없었다’거나 ‘위안부 성노예는 없다’고 외친다.

독일의 네오 나치와 일본 극우파(하나 더 보탠다면, 한국의 신친일파)의 극단적이고 위험한 주장에 귀 기울일 가치는 없다. 그렇지만 영·미 연합군이 엄청난 규모의 잇단 공습 폭탄 테러로 많은 독일과 일본의 비무장 민간인을 죽고 다치게 만든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렇기에 ‘폭탄 홀로코스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재판에서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은 전쟁범죄로 다뤄지지 않았다. ‘승자의 재판’으로 끝났다. 이는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승자에게 유리한 것인가’를 둘러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 이래 오랜 논란의 불씨로 남겨졌다. 다음 주엔 독일과 일본의 의사들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인 생체실험 실상과 세균전을 독자와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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