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은 러시아 전쟁 탓, 우키시마호·하이난섬은 일본·중국 비협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사할린 한인묘 봉분 많이 낮아져 이젠 못 찾을까 걱정”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 사할린 지역으로 강제동원됐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 봉환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해를 넘겼다.
일본에 있는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 유해들과 중국 하이난에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들도 상대국의 비협조 등으로 봉환에 난항을 겪고 있다.
1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정부는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제8차 사할린 한인 유해봉환 신청서를 받은 결과 총 17위의 유해를 선정해 봉환을 추진했다.
애초 지난해 9월 중 봉환을 완료해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 안치할 예정이었으나, 러시아가 전쟁 중이라 봉환 협조가 어렵다는 뜻을 전해 연기됐다.
사할린은 일제 강점기에 수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로 끌려가 탄광·토목공사장·공장 등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현장이다. 학계에서는 2차대전 종전 당시 4만명 이상의 한인이 사할린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 후에도 일본 정부의 방치와 미수교국이었던 옛 소련과의 관계 탓에 1990년 한·러 수교 전까지 귀국길에 오르지 못했다. 상당수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러시아 정부와 사할린 한인묘지 발굴·유해 봉환에 합의한 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7차례에 걸쳐 총 71위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다.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봉환 추진이 어려워졌고, 지난해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봉환을 재추진했으나 전쟁으로 다시 봉환 길이 막혔다.
행안부 관계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올해 다시 러시아 정부와 협의해 봉환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연초에 계획을 세워 러시아에 공문을 보내는 등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1945년 우키시마호 사건으로 희생돼 일본 유텐지에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 275위의 봉환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우키시마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아오모리에서 출발했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마이즈루 인근 해역에서 침몰했다.
이 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에 부풀어 있던 조선인 징용 피해자 등 3천700명가량이 타고 있었다.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는 일본인 승무원 25명을 포함해 549명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2008년부터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해의 봉환을 추진했다.
하지만 유족들이 사건의 진상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해를 봉환하면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빌미가 될 수 있고, 일본의 책임이 없는 것으로도 비칠 수 있다며 반대해 15년 동안 진전이 없다.
행안부 관계자는 “매년 일본과 협의하고 사과를 원한다는 유족 의사도 전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가 사과에 미온적이라 협의가 쉽지 않다”며 “가장 중요한 건 유족분들의 의사이니 꾸준히 그분들의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하이난섬에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유해 봉환도 중국 정부의 비협조로 사실상 추진이 멈춘 상태다.
하이난섬은 일본이 1945년 패망한 후에도 조선인을 학살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1천200구의 유골이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정부는 중국이 하이난섬 유해들을 조사한 현황 자료 및 하이난섬에 대한공동 조사를 중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으나, 중국 정부에서는 아직 별다른 답이 없다.
외부 여건이 녹록지 않지만, 정부가 공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봉환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부친이 사할린에 강제동원됐던 신윤순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피해자 한국잔류유족회장은 “2011년 사할린에 가보니 비석이 없는 묘도 많고, 봉분들만 동그랗게 남아 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 이미 많이 낮아졌더라”고 전했다.
그는 “갈수록 묘 자체가 찾기 힘들어질 텐데 목소리를 내는 유족분들도 대부분 돌아가셨고, 이제 우리가 죽으면 누가 유해 봉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할는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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