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에서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차기 기대주로 촉망받던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이 전격적으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반면 2021년 전당대회에서 승리하며 국민의힘 차세대 기수로 떠올랐던 이준석 전 대표는 국민의힘을 탈당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하루 차이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 소용돌이의 시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한 비대위원장의 수락 연설과 이 전 대표의 탈당 및 신당 창당 기자회견문을 비교 분석했다.
운동권 청산 내세운 한동훈 vs 극단 정치 극복 주장한 이준석
4000자 정도인 한 비대위원장의 수락 연설은 크게 운동권 특정 정치 청산으로 요약되는 ‘왜 정치에 뛰어들었나’와 총선 불출마로 정리되는 ‘어떤 희생과 각오로 임하는가’, ‘어떤 정치를 지향할 것인가’ 등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전반적으로 왜 내년 총선에서 왜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졌다.
한 비대위원장의 각오는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운동권 특권 세력과 개딸전체주의와 결탁해 자기가 살기 위해 나라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어 그는 내년 총선 지역구와 비례 모두 출마하지 않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밝히며, 보다 나은 정치의 비전을 제시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담았다.
6000자 가량인 이 전 대표의 기자회견은 ‘왜 국민의힘을 탈당하게 됐는가’, ‘극단의 정치 극복 필요성’, ‘어떠한 정치를 지향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다. 국민의힘 윤리위원회 징계로 당대표에서 물러나야 했던 이 전 대표는 국민의힘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었던 총괄선대위원장 제안 사실을 공개한 뒤 “그런데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며 “변화가 없는 정치판을 바라보며 기다릴 수 없었다”고 탈당 이유를 밝혔다.
그는 “콜로세움에서 상대를 빌런으로 만드는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저는 일백 번 고쳐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아고라로 들어와 다시 미래를 이야기하도록 강제하겠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왜 적장을 쓰러뜨리기 위한 극한 대립, 칼잡이의 아집이 우리 모두의 언어가 되어야 하냐” 등의 표현을 쓰면서 극단의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집권 세력을 겨냥한 듯 “검찰과 경찰이 주도하는 정치적 결사체”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韓은 추상적 vs 李는 구체적 정책 방향 제시
비판의 대상과 방향성에서도 차이를 보였지만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구체적인 정책의 비전과 방향에 관한 부분이었다. 한 비대위원장은 향후 국민의힘의 정책 방향에 대해 “인구재앙이라는 정해진 미래에 대비한 정교한 정책, 범죄와 재난으로부터 시민을 든든하게 보호하는 정책, 진영과 무관하게 서민과 약자를 돕는 정책, 안보, 경제, 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과학기술과 산업 혁신을 가속하는 정책, 자본시장이 민간의 자율과 창의, 경제발전을 견인하게 하면서도 투자자 보호에 빈틈없는 정책, 넓고 깊은 한미공조 등 세계질서 속에 국익을 지키는 정책,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는 원칙 있는 대북정책, 기후변화에 대한 균형 있는 대응 정책, 청년의 삶을 청년의 입장에서 나아지게 하는 정책, 어르신들을 공경하는 정책, 지역 경제를 부양하는 정책, 국민 모두의 생활 편의를 개선하는 정책 등을 국민께 보여드려야 한다”로 소개했다. 두루뭉술한 원칙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반면 이 전 대표는 “절망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대한민국이 정체된 사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거부할 수 없는 도전들이 쌓여간다. 신당에서는 이 위기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당당하게 표 떨어지는 이야기 하겠다”며 신당의 정책 비전을 소개했다. 시급한 이야기라며 그는 이공계 육성과 의대 정원 확대가 함께 논의되는 상황의 문제점, 지방 대학 지원 대책 중심의 교육개혁 방향의 문제점, 인구 감소 속에서 감군(減軍) 계획을 논의해야 할 필요성, 미적분과 기하를 수능에서 제외하는 결정의 문제점, 국민연금 개혁 등을 주장했다.
정치에 갓 입문한 한 비대위원장이 추상적인 정책 지향점을 내세웠다면, 정치 경력 12년 차에 접어든 이 전 대표는 한층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英 총리 윈스턴 처칠 인용한 한동훈 vs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 인용한 이준석
인용되는 문구 등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한 비대위원장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연설을 몇 군데 차용했다. 그는 “공포는 반응이고 용기는 결심”이라거나 “호남에서, 영남에서, 충청에서, 강원에서, 제주에서, 경기에서, 서울에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용기와 헌신으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세계 2차대전 중 열세의 상황에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북돋기 위한 처칠의 연설을 담았다.
반면 이 전 대표는 TV 드라마 대사를 인용했다. 그는 이날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한 것으로 알려진 가칭 개혁신당의 미래를 소개하면서 ‘재벌집 막내아들’에 나온 “새우 몸집을 키우는 거죠.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지 않을 만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시간은 새우 편 아닐까요”라는 대사를 그대로 읽기도 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대결 구도 속에서 개혁신당은 새우에 해당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가 오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 전 대표는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회사에서 쫓겨난 뒤 설립한 ‘NeXTSTEP’을 언급하며 본인만의 다음 행보를 걷겠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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