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 해 동안 KBS는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 ‘정권 낙하산’ ‘절차적 위법’ 논란과 함께 등장한 박민 사장은 빠른 속도로 KBS의 제작 관행과 의사 결정 시스템을 무력화했다. 공영방송 내부의 제작자율성 보장 제도들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보궐 사장에게 고소·고발장이 쌓이고 있다.
위법 논란 개의치 않은 경영진 교체
윤석열 정부의 KBS 이사·경영진 교체 과정에선 역대 정권이 반복한 나쁜 관행에 새로운 선례가 더해졌다. 지난 정부가 ‘여대야소’(여야 7대4)로 구성한 KBS 이사회에서 야권 2명(윤석년·남영진)을 해임하고 여권 2명(황근·서기석)을 채웠다. 이후 6명이 된 여권 이사들은 김의철 사장 해임, 박민 사장 임명 제청 등을 다수결로 처리했다. 고대영 전 사장 해임 무효 판결문에 지적된 것처럼 ‘사장 해임제청안 상정을 의도로 야권 이사를 부적법하게 해임해 이사회 구성을 변경’했다.
사장 후보 공모 중엔 전례 없는 투표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이사들이 3명의 후보 중 1명을 투표(결선투표 최대 3회)로 결정하기로 했던 10월4일, 서 이사장이 결선투표 직전 이사회를 중단시켰다. 이후 ‘내정설’ 주인공 박민 후보의 경쟁 후보가 자진 사퇴하면서 특정 후보가 탈락할 위기에 놓이자 무리하게 이사회를 멈춘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서 이사장은 재공모를 하자는 야권 이사들 의견을 뒤로 한 채 박 후보 임명제청을 밀어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이 반대하는 후보를 임명하기 전 짧게나마 숙고 기간을 가졌던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인사청문회 5일 만에 박 사장을 임명했다.
노골적인 성향 검증, ‘여권 유착’ 우려
KBS 내부 변화는 박 사장 취임 전부터 감지됐다.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최경영의 최강시사’ ‘홍사훈의 경제쇼’를 진행하던 KBS 기자들이 프로그램 하차와 동시에 퇴사했다. 윤 대통령이 박 사장을 임명하기 이틀 전 11월10일 ‘뉴스광장’ 앵커들이 타의로 물러났다. 이후 박 사장 취임과 함께 라디오 시사 ‘최강시사’ ‘뉴스브런치’ ‘경제쇼’ ‘주진우라이브’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 ‘김성완의 시사야’, 1TV 시사 ‘더 라이브’ 등이 편성표에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국민의힘이 편향적이라고 주장해왔던 프로그램들이 폐지됐다. KBS 메인뉴스 ‘뉴스9’의 이소정 앵커도 박 사장 취임 당일(13일) 전격 교체됐다.
최근엔 KBS 경영진이 소속 노조를 이유로 의도적 차별을 했다는 의혹이 공개됐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8일 국회에서 “하드한 시사에 2노조(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진행자를 쓰는 건 아니다, 이런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임원 이하 간부 사이에”라는 라디오센터 간부의 음성 파일을 공개한 것이다. 해당 간부는 앞서 ‘배종찬의 시사본부’ 제작진에게 특정 패널들을 하차시키라고 지시하고, 이를 거부한 제작진에게 스포츠 프로그램을 배정한 당사자로 알려졌다.
여권과의 유착이 우려되는 장면들도 여럿이다. 지난 12일 박 사장 체제에서 임명된 이충형 KBS 인재개발원장이 충북 제천·단양 국민의힘 예비후보로 등록했고, KBS는 후보 등록일 하루 전인 11일자로 그를 소급 면직해줬다. 11일엔 KBS 사장 후보로 지원했던 이영풍 전 KBS 기자가 부산 서·동구 국민의힘 후보로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19일엔 KBS가 외부 단체이자 친여권 성향으로 분류되는 대한민국언론인총연합회에 KBS아트홀을 대관해주고 이를 뉴스에서 홍보했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유명무실해진 제작자율성 보장 장치
이처럼 KBS 시사·보도 프로그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과정에서 KBS 노사가 만든 ‘공정방송 장치’가 무력화되고 있다. KBS 편성규약은 취재·제작 책임자가 방송 적합성 판단이나 수정에 관해 실무자에게 협의·설명할 의무가 있고, 단체협약은 프로그램 개편 등에 앞서 제작진과 협의 및 교섭대표노조에 설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방송법은 방송 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고 있다. 편성위원회·공정방송위원회처럼 노사가 제작 자율성 위반을 논의할 수 있는 제도 역시 있다.
하지만 박민 사장 체제 KBS에선 이런 제도들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8일 국회에서 고민정 의원이 KBS 편성본부장에게 ‘더 라이브’ 폐지 관련 편성회의 개최 여부를 묻는 과정에선, 박 사장이 해당 본부장에게 “구체적인 건 답변하지 말라”며 답변을 거부하라고 지시한 일도 있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박 사장과 주요 본부장급 인사들을 방송법, 단체협약, 편성규약 위반 등 혐의로 고발한 상태다.
KBS를 비롯해 다수 언론계에서 시행 중인 국장 임명동의제 또한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KBS는 단체협약에 따라 사장이 통합뉴스룸(보도국), 시사교양1·2국, 시사제작국, 라디오제작국 등 국장 임명 시 해당 부서 노조 조합원 과반이 찬성하도록 하고 있다. KBS 사측은 해당 부서 국장을 지명하지 않은 채, 관련 조항 삭제를 주장하고 있다.
‘낙하산 사장’도 대책 없는 재정 위기
박민 사장 취임 후에도 KBS는 지난 7월 수신료 분리징수 여파 등에 따른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전망이다. 앞서 김의철 전 사장의 해임사유 중 하나로 ‘수신료 위기 대응 실패’가 꼽혔는데, 전임 사장을 밀어내고 들어온 사장도 타개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수신료 분리 고지·징수 유예기간인 8~11월 KBS의 수신료 수입은 고지액 대비 약 98억 원 덜 걷혔다. 이 기간 수신료 수입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97억 원 줄었다. KBS 사측은 수신료 수입 결손이 30% 수준일 경우 내년에 3000억 원대 적자가 발생할 거라 전망하고 있다. 박 사장이 지출을 줄이는 차원에서 당장 내년에 인건비 1000억 원을 줄이겠다고 발표한 방침은 여권 인사들에게도 우려를 사고 있다.
박 사장 취임 후 KBS에서 불거진 프로그램 폐지 사태 등은 과거 KBS에 우호적이었던 시민들 사이에서 ‘수신료 납부 거부’ 양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KBS 시청자청원 게시판에는 시청자의 의사와 관련 없이 일방적이고 졸속적으로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다는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재정 위기와 온갖 혼란상 속에서 공영방송 KBS가 추구해야 할 공적 가치에 대한 논의도 실종되고 있다. 보궐 사장인 박 사장의 임기는 내년 12월까지 1년가량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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