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두면 불편” 아파트 방화문, 대형 인명사고 촉매제
화재에 산소 공급 원활하게 해 삽시간에 불길·연기 확산
“일일이 과태료 부과 어려워…닫힌 상태 유지해야 피해 최소화”
(서울=연합뉴스) 사건팀 = 성탄절인 25일 새벽 32명의 안타까운 사상자를 낳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아파트 화재 피해가 커진 데에는 방화문을 제대로 닫아두지 않는 소방 안전 실태도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전문가들은 사고 당시 아파트에 방화문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아 발화 지점인 3층에서 발생한 연기가 계단을 타고 빠르게 상층으로 향한 것으로 추정한다.
화재를 최초로 신고한 10층 주민 임모씨는 11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는데, 소방 당국은 임씨가 계단을 타고 온 연기를 흡입해 질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방화문은 건축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복도나 계단, 출입구 등으로 연기·불꽃 확산을 막기 위해 설치되는 문이다. 열어놓으면 화재 발생 시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해 연소 속도를 빠르게 하고 대피 시간을 단축한다.
2018년 고령자를 중심으로 2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낸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건에서도 방화벽의 부재가 피해 확산의 주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건축법 시행령 46·64조 등은 아파트의 방화벽 설치 의무와 종류 등을 규정하고 있다.
또 ‘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방화문은 언제나 닫힌 상태를 유지하거나 화재로 인한 연기·불꽃 또는 온도를 감지해 자동으로 닫히는 구조로 설치하게 돼 있다.
하지만 방화문의 규정과 용도를 모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통행을 위해 열어놓거나 벽돌 또는 말굽을 받혀둬 기능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경우가 빈번하다.
연합뉴스가 26일 서울 각지 아파트를 찾아 방화문 개폐 여부를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아파트에서도 이같이 방화문을 개방해둔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이날 강남구 대치동의 한 대단지 아파트 3개 동 각 15개 층을 전부 둘러봤더니 방화문이 닫힌 층은 ‘0곳’이었다.
문을 고정하기 위해 소화기를 놓아둔 곳도 절반 가까이 됐고 골프채, 자전거, 개인형 이동장치(PM) 등 무거운 물체를 문 앞에 둔 곳도 쉽게 보였다.
문 위쪽에 붙은 ‘방화시설 주위에 물건을 쌓아두거나 장애물 설치 등 소방 활동에 지장을 주는 행위를 할 경우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된다’는 경고문이 무색한 모습이었다.
이 아파트 주민 홍모(45) 씨는 “상가에선 닫아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파트에서도 닫고 있어야 하는 줄은 잘 몰랐다’며 “2층에 살아서 늘 계단으로 다닌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는데 닫아두면 불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관악구 봉천동 일대 아파트와 빌라 3곳 중에도 방화문을 제대로 닫아놓은 아파트는 한 곳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방화문 앞에 생활 쓰레기 등 적치물이 쌓여 대피로를 막고 있었다.
인근 12층짜리 규모의 한 아파트에는 방화문이 아예 설치돼있지 않았다. 주민 유모(42)씨는 “대형화재는 고층 건물에서만 난다고 생각해서 평소 방화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14층 아파트를 7층까지 살펴본 결과, 방화문은 모두 닫혀있었으나 1∼2층을 제외하고는 방화문 앞에 적치물이 가득했다.
화재 시 새까만 연기가 앞을 가린 상황에서 대피를 방해해 자칫 인명 사고를 키울 수 있는 장애물이다.
아파트 경비원 A씨는 “아무리 말해도 안 치우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냐. 매일 문을 두들겨서 치우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77세대가 거주하는 마포구의 한 아파트는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방화문이 없이 한 개의 계단으로 연결돼있었다.
양 세대가 마주 보는 가운데 계단이 놓여 불이 난다면 마치 굴뚝처럼 연기가 상승할 수 있는 구조였다.
거주민 김모 씨는 “도봉구 화재처럼 저층에서 나면 사실상 대피할 수가 없어서 걱정된다”며 “아래로 대피할 수 없으면 화재가 번지는 걸 막아야 하는데 방화문이 없어서 고민스럽긴 하다”며 우려를 드러냈다.
이처럼 대부분의 방화문이 입법 취지와 다르게 관리되고 있지만, 일일이 점검하기도 어려워 사실상 입주민 자율에 맡겨야 하는 실정이다.
소방 당국 관계자는 “소방 점검을 나가면 주민들에게 관련법을 고지하고 방화벽을 닫아두라고 말씀드리지만, 지켜지는 경우가 잘 없다”며 “일일이 과태료를 부과하기는 어려워 시정조치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발화지점 인근 주민은 빨리 화재를 인지하고 대피할 수 있지만 다른 층 주민들은 대피 도중 연기를 흡입해 사망하거나 부상하는 경우가 잦다”며 “공동주택 또는 고층 건물 계단실의 방화문이 잠긴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인명 피해를 줄이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박형빈 계승현 이미령 안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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