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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노숙인에 판사가 건넨 책…위화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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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죄는 부정적인 것이지만 그 죄는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기에 부정적인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 구절이다. 최근 한 판사가 노숙인에게 유죄 선고를 내린 뒤 딱한 사정을 위로하며 책과 10만원을 건넨 것이 알려지며 해당 구절도 함께 언급되고 있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지난 20일 특수협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50대 남성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보호관찰 2년도 함께 명령했다.

A씨는 지난 9월 28일 오전 1시쯤 부산의 한 편의점 앞에서 또 다른 노숙인 B씨와 함께 술을 마시다 말다툼 끝에 흉기를 꺼내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당시 그는 흉기를 꺼낸 뒤 스스로 칼을 밟아 부러뜨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시민의 신고로 체포됐으며 주거가 일정치 않은 탓에 구속됐다.

박 부장판사는 ▲A씨가 현장에서 흉기를 스스로 발로 밟아 부러뜨린 점 ▲피해자 B씨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 ▲초범인 점 ▲개과천선할 여지가 있는 점 등을 들어 실형을 면해주었다.

이어 박 부장판사는 “생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있느냐”라는 걱정과 함께 “주거를 일정하게 해 사회보장 제도 속에 살고 건강을 챙겨라”라고 당부했다. 또 A씨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전달받고 중국 작가 위화가 쓴 ‘인생’이라는 책과 함께 현금 10만원을 챙겨주기도 했다.

‘인생’은 ‘허삼관 매혈기’로 유명한 중국 작가 위화의 대표작이다.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출판사는 “해방 전후부터 약 40년간의 중국 역사를 가혹하다는 의식조차 없이 묵묵히 살아낸 중국 민초들의 삶을 ‘생명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꺼이 인정한 작품으로, 위화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개했다.

A씨는 부모가 사망한 후 30대 초반부터 노숙을 했으며 폐지나 고철을 수집하며 고립된 생활을 이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박 부장판사는 A씨에게 “어머니 산소를 꼭 찾아가 보시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해당 말을 들은 A씨는 박 부장판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눈시울을 붉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 부장판사는 “일반인이라면 구속되지 않을 사안이었으나 노숙인에 대한 편견으로 구속된 게 안타까웠다”며 “개인적 미담으로 끝나는 대신 함께 사회적 약자를 돌아볼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박 부장판사는 2019년에도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자만 살아나 자살방조 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지금보다 좋은 날이 올 것으로 확신한다’는 편지와 함께 차비 20만 원을 건네는 등 법의 목적이 처벌이 아닌 개선에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고기정 인턴 rhrlwjd031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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