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드라마 스태프 A씨는 최근 적금을 깼다. A씨는 신예 배우가 출연하는 이 드라마에 7월부터 그립 담당(촬영장비)으로 참여했는데, 제작사가 지난 10월 돌연 촬영을 중단하더니 며칠 뒤 모든 스태프에 ‘계약해지’를 통보하면서다. 임금은 9월 치부터 밀렸다. 그는 “촬영을 잠정 중단한다고 해 하염없이 소식을 기다렸는데, 제작사가 돈이 없단 이유로 임금도 주지 않고 실직시켜버린 셈”이라고 했다.
함께 일하던 촬영·그립 스태프 8명은 해당 제작사를 상대로 고용노동부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A씨가 받지 못한 임금은 900만 원을 넘어선다. 그는 “우리 현장의 거의 모든 스태프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연출 스태프 B씨도 ‘ㅁ’ 드라마 촬영을 지난달 종료한 뒤 두 달 치 임금을 지급받지 못해 당장 생활고에 부딪혔다. B씨는 “고정적 생활비 지출에 지장이 생겼다”며 “형식상 프리랜서라 대출을 받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스태프 C씨가 참여한 ‘ㅅ’ 드라마도 두 달 전 촬영을 마쳤지만 2개월치 임금을 못 받았다. 이들 드라마는 모두 제작사가 판매처를 찾지 못해 방영 여부가 불투명하다.
올 들어 드라마 제작 현장에 임금체불 피해가 번지고 있다. 영상콘텐츠업계가 전반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 신생 제작사들이 ‘글로벌 OTT 플랫폼 붐’을 보고 뛰어들면서다. 제작사들이 투자사나 편성이 확정되지 않은 채 제작에 들어가고, 끝내 판매처를 찾지 못한 피해는 스태프 노동자가 가장 먼저 보고 있다.
임금체불 신고 올해 189건, 평균 74건서 급증
영화산업 노사정이 공동 운영하는 ‘영화인신문고’가 올해 접수한 스태프의 임금체불 피해 건수는 15일 현재 189건. 연 평균(올해 포함)인 74건의 두 배를 훌쩍 넘었다.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도 조합원의 체불 신고로 제작사와 협상에 나선 드라마가 올해 4건으로 예년보다 많다고 밝혔다.
임금체불은 ‘OTT 방영을 목표로 한 드라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지난해 0건이던 OTT 콘텐츠 제작현장 임금체불 신고가 올해는 73건으로 뛰었다. 공공운수노조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실제 피해 규모가 더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2년 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금체불 등 부당대우를 겪은 스태프가 ‘대응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7%에 달하기 때문이다.
불황인데 ‘K-콘텐츠 거품’ 겹쳐
지급여력 없이 뛰어드는 제작사들
임금체불 문제가 올 들어 급증한 건 왜일까. 근본적으로는 영상 콘텐츠 업계 불황을 꼽는다. 홍태화 영화인신문고 사무국장은 “영화 쪽은 코로나19 이후 개봉 시기를 놓치고 묶여 있는 작품이 100편 정도”라며 “업계가 불황이라 돈은 돌지 않고 있다. 그만큼 검증된 회사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신생 회사가 제작에 나설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제작사협회가 집계한 올해 회원사 제작 편수는 총 123건(잠정)으로 작년 135편보다 줄었다. 편성할 곳을 못 찾은 작품이 최대 15건으로 예년의 한 자리 수보다 크게 늘었다. 배대식 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총장은 “문제는 내년이다. 편성이 안 돼 (촬영) 들어가지도 못한 작품이 더 많다”고 했다.
편성은 플랫폼을 불문하고 줄어드는 추세다. 촬영을 마쳤지만 판매처를 찾지 못해 스태프 임금 지급을 지연했다고 밝힌 드라마제작사 관계자 D씨는 “지상파 방송사들은 드라마 시간대를 절반 이하로 줄였다. OTT들의 오리지널 제작 편수도 줄었다”며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들어갔지만 편성할 곳을 찾지 못한 작품도 부지기수로 안다”고 했다.
제작사들이 투자 등 자금 조달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단 제작에 들어가는 업계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 홍태화 국장은 “영상 콘텐츠 업계에 신생 제작사가 많은 이유가 있다. 제작사는 자기자본을 들이지 않고 투자사로부터 수십, 수백억 원을 끌어오거나 협찬과 PPL을 껴 제작한다. 그리고 성공하면 엄청난 인센티브를 받는다”며 “그러니 자금 융통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상영 플랫폼도 결정이 되지 않았는데 일단 제작에 들어가고 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K-콘텐츠 거품’까지 겹쳤다. OTT 붐이 일면서 경험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제작사가 늘었다. 홍 국장은 “OTT에서 특히 임금체불 신고가 급증한 건 ‘K콘텐츠 버블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은 “현실적으로 지불 능력 없는 제작사들이 어떤 보장 없이 ‘OTT에 팔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드라마 제작에 뛰어든다. 실제로는 업계가 불황이니 콘텐츠가 팔리지 않는다. 그러니 당장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에게 잔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두영 방송스태프지부 조합원(초대 지부장)은 “옛날엔 편성 뒤 방영 시간을 맞추려 스태프를 쥐어짜는 쪽대본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웹드라마 등도 사전 제작해 판매하는 형식이 됐다. 그러다 보니 촬영 종료 전까지 판매나 편성이 결정되지 않으면 돈 없는 제작사들은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급보증 제도 필요…노조 찾아 요구 모아야”
편성이 되지 않을 때 피해는 곧바로 드라마와 영화를 만드는 스태프 생계에 영향을 미친다. 임금체불과 계약해지를 겪은 A씨는 “임금체불은 회사 자금 조달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인데, 현장에서는 그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다. 회사가 일반 스태프들에 절대 (문제 원인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게 그들의 원칙 아닌 원칙 같다”며 “그 피해는 스태프가 보고 있다. 팀의 막내 스태프는 이번 일로 힘들어해 아예 이 일을 관둬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스태프지부는 제작사 지급 여력 문제가 스태프 임금체불로 직결되는 일을 막으려면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지부는 대안으로 지급 보증금을 의무화하거나 보증보험에 들도록 해 ‘불량 제작사’를 걸러내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급선무로는 방송스태프지부 또는 영화노조(영화인신문고)를 찾아 해결할 것을 권고한다.
김두영 조합원은 “스태프 개인이 임금체불을 해결하려 노동청을 찾으면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지부로 찾아오곤 한다. 스태프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근로감독 결과가 나온 지 오래지만 노동청이 도리어 안일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라며 “사건을 해결하려면 제작사와 직접 협의해야 하는 만큼 노조가 요구를 모아 나설 때 힘이 실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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