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34개 여론조사업체가 가입한 한국조사협회는 10월23일 ‘정치선거 전화여론조사기준’을 제정하고 가입사에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핵심은 ‘ARS조사 금지’입니다. 대부분 언론은 한국조사협회 입장을 보도하면서 ‘ARS여론조사 퇴출’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한국조사협회에는 이미 면접조사를 주로 하는 업체만 가입돼 있으며, 주로 ARS조사를 하는 업체는 별도로 ‘한국정치조사협회’에 가입돼 있다는 점에서 마치 특정 조사협회 입장이 여론조사업계 전체의 입장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게 맞는지 의문입니다. 최근 면접조사보다 ARS조사에서 야권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흐름이 나타나자 여당과 친여성향 언론은 ‘ARS 조사 금지 법제화’까지 요구하고 있는데, 여권이 특정 조사방법을 쓰는 업체에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입니다.
한국조사협회 업체, 이미 면접조사 주로 사용
이번 한국조사협회 정치·선거 여론조사 기준 제정이 ‘ARS조사 퇴출’이 되려면, 소속업체들이 ARS조사를 이미 시행하고 있어야 합니다. 시행하지 않는 방식을 퇴출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조사협회 34개 회원사를 살펴보니 이중 15개 업체는 여심위에 등록되지 않아 선거여론조사를 할 수 없는 곳이고, 정치·여론조사를 자주 시행하는 13개 업체는 주로 면접조사를 하는 곳입니다. 여심위로부터 등록취소된 업체도 두 곳(마크로밀엠브레인, 칸타코리아)이 있습니다.
그런데 10월22일부터 24일까지 네이버 포털에서 이를 보도한 70여건 기사는 대부분 제목에 인용 표시를 하지 않거나 여론조사 기준이 ‘한국조사협회 지침’이란 점을 명시하지 않아 마치 공식적으로 ARS 여론조사가 신뢰성이 낮아 금지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ARS조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은 ‘한국조사협회’이고, 리얼미터와 조원씨앤아이 등이 속한 ‘한국정치조사협회’ 회원사들은 ARS조사를 계속 하기로 했기 때문에 ‘ARS조사가 퇴출’됐다거나 ‘ARS가 금지됐다’는 식의 보도는 정확한 사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가짜뉴스 뺨치는 저질 여론조사’라고? 강서구청장 선거결과 예측 높은 곳은
한편, 여심위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곧바로 수준 이하의 여론조사업체인 것은 아니며, 정치여론조사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여심위는 선거 관련 여론조사만 규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사설-가짜 뉴스 뺨치는 저질 여론조사 법적으로 규제해야>(10월27일)에서 2022년 9월 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론조사를 진행한 넥스트위크리서치를 비판하며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여심위) 미등록 업체가 취임한 지 반년밖에 안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고 문제 삼았습니다. 실제로 한국조사협회 소속으로 여심위 등록을 하지 않은 15개 업체 중 상당수가 정치현안 여론조사를 하고 있지만, 조선일보를 포함해 어떤 언론도 이를 저질 여론조사라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여심위 미등록 업체 중 문제가 된 사례는 한국조사협회 소속으로 명함정보 수집 앱 ‘리멤버’를 운영하는 드라마앤컴퍼니가 대한변호사협회(변협) 회장 선거 관련 여론조사를 진행하다가 변협으로부터 ‘선거 개입’ 항의를 받은 일입니다.
10월11일 실시된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ARS조사나 특정 여론조사업체를 일방적으로 저질 여론조사로 폄훼할 근거는 없습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4개 업체가 여론조사를 시행했는데, 유튜브방송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진행자인 김어준 씨가 설립한 ‘여론조사꽃’은 9월22일 여론조사에서 진교훈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김태우 국민의힘 후보의 득표율 격차를 16.0%로 집계해 실제 득표율 격차(17.2%)를 1% 차이로 맞췄습니다. 게다가 한국조사협회 여론조사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여론조사꽃의 강서구청장 선거 여론조사는 ARS가 아닌 면접조사인데다 응답률 10% 기준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는 8월30일에는 두 후보가 박빙이라는 결과를, 9월 중순에는 두 후보간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습니다. 서경선 폴리뉴스 기자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지지율 전망, 국힘 김태우 40% 대 민주 진교훈 55%>(10월1일)에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근거로 한 자체 분석을 통해 최종 득표율을 김태우 후보 40%(실제 39.4%), 진교훈 후보 55%(실제 56.5%)로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여론조사 결과에만 연연해 일방적으로 폄훼하기보다는 여론조사를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여론조사 불신 논란의 상당 부분은 여론조사업체보다는 언론의 경마식 보도, 정파적 보도가 유발한 측면이 더 큽니다. 언론은 여론조사 결과를 읽을 때 알아야 할 신뢰도, 오차범위, 표본조사 의미, 표본 크기 의미 등 기초적 지식과 조사방법 차이, 유·무선 비율, 안심번호 제도, 조사시간 등 유의점을 독자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수학적으로 의미 없는 3% 미만의 변화를 침소봉대해 보도하거나 정파적 유불리에 따라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여론조사를 일방적으로 폄훼했을 따름입니다. 언론은 ‘저질 여론조사 퇴출’보다 ‘저질 여론조사보도 퇴출’이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때입니다.
– 모니터 대상 : 2023년 10월22~27일 네이버 포털에 게재된 한국조사협회의 ‘정치선거 전화여론조사기준 제정’ 관련 기사
※ 미디어오늘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민언련 모니터 보고서’를 제휴해 게재하고 있습니다. 해당 글은 미디어오늘 보도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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