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죽음 때문에 유한성에 갇히는 동시에 무한의 의미 얻어…우리는 왜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가
먼지 자욱하지만 윤핵관 제일검 불출마 하고…자신이 대선후보인 줄 알았던 당의 수장 사퇴는 다행
총리와 당 대표 지낸 야당의 노구(老軀)까지 신당 창당에 가담할 일인가…호남서 제3당 힘들어
내년에도 경제전망 어두워, 어공만 없어도 일할 맛 나는 공무원들…올 겨울 다가도 ‘MBC의 봄’ 힘들 듯
어느 작가의 노래처럼 죽음은 삶을 삶답게 하는 전제가 됩니다. 삶은 죽음 때문에 유한성에 갇히지만 또한 그 죽음 때문에 무한과도 견줄 만한 의미를 얻습니다. 나이를 먹으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엄혹함에 순응(順應)하고 나면 죽음의 의미보다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해 집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기에 그 낯설고 생경한 손님이 불현듯 찾아와 삶의 종말을 고하기 전에 살아있는 하루하루의 시간을 유용하게 소진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고 곱씹는 이유도 이런 까닭입니다.
올 한해도 소란스러움의 정점에는 정치가 있었습니다. 정치란 아낌없이 싸우는 겁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싸우고 얻고 나면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이런 본질 때문에 정치인들의 숨소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능란한 세치 혀로 국민들을 팔고 표를 구걸하는, 많이 배운 야바위꾼들입니다. 지난 가을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일격을 당한 여당은 총선을 앞두고 혁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해가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먼지만 자욱합니다. 이미 당은 다이묘(에도 막부시대 1만 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의 지배를 받은 지 오래고 준비 없이 나라를 접수했던 용산의 칼잡이들은 아직도 진영 구분을 못한 채 칼끝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국모(國母)는 여전히 비호감 프레임에 갇혀 있고 쇄신의 총대를 메었던 파란 눈의 할아버지는 한국말 잘한다는 평가만 얻은 채 물러났습니다. 대통령의 언질 때문인지 비주류의 총질 때문인지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관계자) 제일검이 불출마 선언을 하고 자신이 정말 대선 후보인줄 알았던 당의 수장이 대표직을 내려놓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물론 눈만 뜨면 탄핵놀이로 하루해를 거덜 내는 여의도의 붉은 함성을 저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죠. 누구 하나 거친 응전(應戰)으로 대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관적인 총선 전망이 난무하는 가운데 하버드를 나온 버릇없는 아이만 노났습니다. 그가 박근혜 이후 가장 무서운 보수의 총아이고 보수의 미래라는 얘기도 있던데, 과연 그를 따라 몇 명이나 출당할지 궁금합니다.
대형 선거만 있으면 역병(疫病)처럼 번지는 것이 신당 창당이지만 총리와 당 대표를 지낸 야당의 노구(老軀)까지 가담할 일인가 생각하면 실소가 나옵니다. 이미 지난 대선 경선에서 패배했을 때부터 진영은 그의 우유부단함에 치를 떨었는데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정치 감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일 지역 기반인 호남을 믿고 단행할 생각이라면 큰 오산입니다. ‘안철수 학습효과’가 있는 호남은 당분간 제3당이 힘듭니다. 지난 2016년 ‘안철수 신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안철수라는 대권 후보에 정동영, 박지원, 천정배, 박주선 등 호남의 거물 중진들이 대거 가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공하자마자 당은 내홍으로 발기발기 찢기어 분열됐으며 결국 2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호남 사람들이 평생 제일 후회하는 게 2016년에 안철수 신당 찍어준 것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재명과 개딸(강성 지지층)을 싫어하지만 ‘반윤정서’가 더 강하기 때문에 현 정부 심판에 해가 되는 일이면 무조건 배신행위로 간주할 것입니다. 정치적 후각이 남다른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한다고 날마다 부르짖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총체적으로 말아먹은 경제를 윤석열 정부가 설거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훗날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한 시민사회수석과 평생 삽질 한 번 안 해 봤던 여성 국토해양부 장관이 야기한 부동산 재앙의 여진이 정부를 넘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폭등한 가계부채는 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이자 갚기로 이어졌고 국내 소비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중국 경제마저 곤두박질치는 대외악재가 겹쳤고 효자였던 수출도 불황형 흑자를 내며 연중 내내 부진했습니다. 내년에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울함을 더합니다. 실제로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미중 패권 다툼 속에 2개의 전쟁은 끝날 기미조차 안 보여 우리 경제의 장기간 저성장 기조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일선 공무원들은 자기 이름 석 자 겨우 쓰면서 누구누구 뒷배와 연줄로 대통령실과 부처에 입성해 밑의 실무자들이 밤새워 써준 원고나 예쁘게 읽고 사진이나 찍다 홀연히 사라지는 어공(어쩌다 공무원)들만 없어도 일할 맛이 난다고 합니다. 월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든 빨리 되고 싶지 않고 그게 누구든 잘 보이고 싶지 않다, 그저 내 시간만 뺐지 말라는 2030 MZ세대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기도 무능도 그들만의 특권일 뿐 결국에는 꼰대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니 주접스럽게 어울리려고 하지 말고 항상 카드만 쥐어주고 빠지라는 어느 중앙부처 국장의 말이 오늘따라 처연하게 들립니다.
올 겨울이 다가도 ‘MBC의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고초를 겪었던 이웃의 방송사는 아쉽고 부족한 대로 거버넌스 체인지(governance change)는 마쳐 도약의 시즌2를 준비하고 있건만, 가장 먼저 정상화의 길을 모색할 줄 알았던 방송사가 적군(敵軍)의 잔혹한 탄압과 관군(官軍)의 안일한 방치로 6년 유형의 세월에 또 한 해를 더해야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의병(義兵)들은 강렬한 저항과 절망적인 발악 사이 어느 지점에서 울분을 토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몸담았던 사내 곳곳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낭패감과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세월만 탕진하고 있다는 불안감은 이미 습(習)이 돼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언제 또 짓밟힐지 모르는 벌레 같은 유배 생활의 모멸과 굴욕도 한솥밥 먹었던 동료들의 그 날의 배신보다는 덜 아프기에 기꺼이 감내할 만합니다. 두려운 것은 해가 바뀌어도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꿈꿀 수 없는 것입니다. 본디 연약한 기반 위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 희생과 비용을 치렀으면 보상과 위로가 찾아올 때도 됐습니다. 무엇보다 특정 정파의 주술에 걸려 집단 최면에 빠진 홍위병들에게 더는 공영방송의 안위를 맡길 수 없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 독자들의 확증편향에만 영합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언론지형에,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보니 자기편이 등 돌릴 지도 모르는 ‘진실 찾기’에 몰두하는 눈 밝은 납자들은 더욱 귀해졌습니다. 세밑에 전해진 큰 스님의 입적(入寂) 소식은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평생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셨기에 그런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신 것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는데, 그 시점이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계속 남습니다. 일각에서는 큰 스님의 열반으로 누가 가장 이득을 보았는지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며 진상규명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경찰도 언론도 조계 종단의 입만 바라보며 서둘러 마무리한 느낌은 있습니다. 총무원장 스님은 “상당 기간 생각을 하셨던 것 같고 다만 그 때가 지금이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이 선물하고 시간이 빚은 비현실적인 풍광에 이끌리듯 생전의 큰 스님은 특유의 흡인력과 친화력으로 중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십 수 년을 뵈었지만 “잘 지내?” “자주 와” 같은 일상의 언어로 흔쾌히 곁을 내주셨기에 일대사를 여의고 적멸(寂滅)에 드신 이 순간에도 문만 열면 눈앞에 서 계실 것 같습니다. 옹졸한 마음에 떠나시기 전 몇 년 동안은 찾아뵙지 않았습니다. 사무칩니다.
당장 내 눈 앞의 쓸모와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겨 한때는 나의 삶에 버금가는 소중함이었던 사람들을 잊고 삽니다. 아니, 짐짓 외면하고 눈감으며 어지간하면 지금은 안 찾아주길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두운 미망(迷妄)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간절히 품어줬던 피붙이들이 있고, 남들 걸어갈 때 사력을 다해 뛰어가 겨우 보폭 맞추고 살던 시절, 끝까지 손을 잡아주며 기운 내라고 속삭여줬던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빨리 갈림길을 만나 달뜬 숨소리로 노여워하던 이별의 말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얼굴조차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아득히 멀어져 똑같은 색깔로만 떠오르는 내 젊은 날의 무심한 흔적들입니다. 깊어가는 겨울밤, 밀려드는 몽롱한 취기에 평소 마음 한 곁에 숨겨뒀던 죄책감은 배가 됩니다. 수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하고 싶은 말 보다는 해야 할 말들을 정리해보지만 끝내 다른 날로 또 미루고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아직은 많은 날이 남았고 그때도 그리 늦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우치(愚癡)의 업만 더 쌓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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