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동물용 마취제, ‘마약’으로 분류돼 국내 수입 안돼
‘도입 필요’ 목소리 나오지만…오남용 등 우려도
(서울=연합뉴스) 홍준석 기자 = 코끼리와 기린 등 대형동물에게 사용하기 적합한 고위력 마취제를 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동물원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발단은 지난 3월 있었던 그랜트얼룩말 ‘세로’ 탈출 소동이다.
당시 의료진은 세로를 생포하기까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제 데토미딘을, 통증에 반응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취제 케타민을 총 7차례 투여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동물복지와 고통 최소화 차원에서 더 강한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투여 횟수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4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정의당 이은주 의원이 환경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국내 공영동물원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진정·마취제 성분은 16종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마취제로는 케타민·졸레틸(틸레타민·졸라제팜)·프로포폴·알팍살론, 흡입마취제로는 이소플루란·세보플루란이 있다.
진통제 부토파놀·레미펜타닐과 진정제 데토미딘·메데토미딘·자일라진·다이아제팜·에이스프로마진·로라제팜·아자페론 등도 활용된다.
해당 목록에는 코끼리와 기린, 얼룩말 등 대형동물에게 사용하는 대표 진통제인 에토르핀과 카펜타닐이 빠져 있다.
마약류관리법에 따라 마약으로 분류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동물원들은 에토르핀과 카펜타닐이 실질적으로 대형동물에게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마취제이고 마취 효과를 높여 외과수술을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며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몸무게가 커지면 진정·마취제 강도를 높이거나 용량을 늘려야 진정·마취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주사기를 발사하는 마취 장비인 ‘블로건(blowgun)’을 활용하는 경우 용량을 5㎖ 이상으로 늘릴 수 없기 때문에 저용량 고효율 약물 필요성이 커진다.
청주동물원 진료사육팀장인 김정호 수의사는 연합뉴스 통화에서 “(세로처럼) 7발이나 맞고도 가만히 있을 동물이 많지는 않다”라며 “시민 안전도 있고 동물이 무사히 돌아오려면 약력이 큰 마취제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다만 환경부는 동물복지 차원에서 고효율 동물용 마취제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후관리 미흡으로 사람에게 사용되거나 오남용되면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에토르핀 약효는 모르핀의 50∼100배, 카펜타닐 약효는 모르핀의 1만배에 달한다.
수의학계는 사람도 소량의 에토르핀과 카펜타닐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큰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길항제를 투여할 것을 권고한다.
동물원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에토르핀과 카펜타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수익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라고 동물용 의약품 수입업계 관계자들은 전했다.
작년 말 기준 국내 동물원 114곳 가운데 코끼리를 보유한 동물원은 8곳, 기린을 보유한 동물원은 5곳에 불과하다.
외과수술이 아닌 생포 작전에는 에토르핀과 카펜타닐만큼 강력한 진정·마취제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세로의 경우 ‘왜 그렇게 주사를 많이 맞혔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료진은 세로가 흥분상태임을 고려해 진정·마취제를 여러 번 나눠 서서히 투여하는 ‘적정(titration)’ 요법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적정 요법을 활용하면 주사 횟수가 늘어나는 대신 마취제 중독으로 인한 사망사고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수익성이 낮더라도 대형동물용 마취제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면 정부가 나서서 수입할 수도 있다”라며 “정부가 취급 과정을 철저히 관리하면 오남용 우려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형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대형동물 (수술·진료에) 활용할 수 있는 마취제를 준비해서 활용할 수 있으면 좋다”라면서 “수의사 면허를 가진 전문가가 마취제를 사용하면 오남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honk0216@yna.co.kr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