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공짜 야근이야”…’포괄임금제’의 늪에 빠진 월급쟁이들
= 서울 광화문의 한 빌딩에서 직장인들이 야근을 하고 있다. 2018.7.2/뉴스1 |
대한민국이 ‘공짜야근’에 시달리고 있다. 초과 근무를 하고도 ‘포괄임금제’라는 이유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무직 근로자들이 상당수다. MZ세대(1980년대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는 이를 두고 ‘현대판 노비 문서’, ‘야근 자유이용권’이라며 조롱한다. 윤석열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이 ‘주 69시간 근무제’, ‘과로사회 조장법’이라며 비판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포괄임금제’와 지금처럼 오·남용되는 현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포괄임금제를 제한 또는 금지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야당이 이 같은 방향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제도 개선이 이뤄질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공짜야근 없다” 포괄임금제 손질 나선 정부·여당
15일 고용노동부와 정치권에 따르면 지난달 6일 정부가 발표한 ‘근로시간 개편안’의 입법예고 기간이 17일 종료된다. 정부와 여당은 입법예고 기간 수렴된 의견을 토대로 탄력적 근로시간, 일한 만큼 받는 정당한 보상, 눈치 보지 않는 휴가 활성화 등에 초점을 맞춘 제도 개선 방안을 보안키로 했다. 일감이 몰릴 때 많이 일하고 쉴 때는 적극적 휴식시간을 확실히 보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짜야근’을 부추기는 ‘포괄임금제’의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부와 여당의 공통된 판단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반대 여론의 기저에는 포괄임금제 때문에 일한 만큼 받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다.
포괄임금제란 연장, 야간, 휴일 근로에 상응하는 수당을 실근로시간과 무관하게 기본임금에 포함해 지급하는 방식의 임금 약정 방식이다. 법으로 정해진 제도는 아니다. 포괄임금제는 근로기준법에 근거를 두지 않고 대법원 판례에 의해 근무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예외적으로 인정된 관행이다.
지난 13일 국민의힘 청년 지도부와 정부 관계자, 대통령실 청년정책 담당 행정관 등이 함께 하는 ‘청년 당·정·대(당·정부·대통령실)’는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청년들을 만나 주 69시간 근로제와 관련한 우려를 듣고 ‘정당한 보상’에 대한 방안 마련을 약속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병민 최고위원은 “지금 당정의 초점은 많은 근로자들이 제기하는 초과 수당을 못 받는 임금 체불이나 공짜 야근 등 포괄임금제 부작용 문제에 맞춰져 있다”고 전했다.
◇포괄임금제, 원칙적으로 불법…현실은 일상
사실 출퇴근과 근무시간을 명확하게 관리할 수 있다면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건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더라도 노사 합의는 필수 조건이다. 그럼에도 포괄임금제는 국내 기업 3곳 중 1곳이 운용할 만큼 보편화됐다. 2020년 노동부가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포괄임금제 적용사업체는 조사 대상인 2522곳 중 749곳(29.7%)에 달했다.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은 일반 사무직과 사업장도 계산상 ‘편의’를 들어 포괄임금제를 오남용하고 있는 셈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은 머니투데이 the300(더300)과의 통화에서 “포괄임금제가 취지와 달리 오남용되면서 공짜 야근, 임금체불을 야기한다는 문제제기에 대해서 공감한다”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당에서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지난달 31일 정부, 대통령실과 간담회를 가진 뒤 “경직적이고 획일적인 1주일 단위의 근로시간 규제를 고치겠다는 것과 포괄적인 임금제 오남용을 근절하고 근로자 대표제를 보완하는 등 현장에서 악용될 수 있는 여러 내용을 방지하는 것을 법제화하는 방향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정부도 포괄임금 오남용 방지 또는 근절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박수연 고용부 노동현안추진단 과장은 “포괄임금제 근절에는 확실한 의지가 있다”며 “이정식 고용부 장관이 여러 차례 말했듯 근로시간 개편은 실질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공정한 보상체계 확립이라는 취지가 있는데, 현장의 우려가 없도록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방안이 뭔지 고민하겠다”고 했다.
고용부는 불법적으로 포괄임금제를 도입하고 있는 기업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할 방침이다. 고용부는 포괄임금제를 오남용했다고 의심되는 사업장에 대해 1차 감독에 들어갔고, 결과를 이달 말 또는 다음달 초에 발표할 예정이다.
(세종=뉴스1) 김기남 기자 =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0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노동개혁 추진 점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2023.4.1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야당도 “포괄임금제 제한 또는 금지”…국회 논의 속도 붙을듯
당정 뿐 아니라 야당도 포괄임금제 손질에 동의하고 있는 만큼 향후 국회에서도 관련 논의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사실 포괄임금제 제한 또는 금지를 먼저 주장한 것은 야당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포괄임금제는 사실상 노동 시간 연장을 꾀하고 공짜 근로를 강요하는 제도”라며 “반드시 개혁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포괄임금제 보완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총 3건이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장시간근로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포괄임금계약을 제한하고 사용자가 근로시간을 측정·기록하고 고용부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같은당 박주민 의원의 법안은 포괄임금계약 금지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위반 시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 안은 포괄임금계약을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근로시간, 임금 등 입증책임을 사용자가 부담하도록 한다.
포괄임금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어제 오늘 얘기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포괄임금제 폐지’를 선정했다. 2017년 11월 고용부는 ‘포괄임금제 사업장 가이드라인’ 초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상 명시되지 않은 제도에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악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 적용을 미루며 논의는 흐지부지 됐다.
◇’앱’으로 출퇴근 기록?…근로시간 산정 등 과제
노동 전문가들은 포괄임금제 손질을 위해선 무엇보다 정확한 실태파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만큼 포괄임금제에 대한 실태조사나 연구가 많지 않다”며 “비록 논의의 시작은 근로시간 유연화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게 됐지만 정공법으로 포괄임금제 현황, 규모별 기업에 따른 실태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문제점과 불공정성을 바로잡아 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오 위원은 “법·제도가 아닌데도 산업 현장에서는 편리한 부분이 있다보니 포괄임금제가 점점 더 확대돼 왔을 것”이라고 봤다.
포괄임금제를 금지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적용해 초과근무에 합당한 보상을 주려면 정확하게 몇 시간 근무 했는지, 출퇴근 시간을 기록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대기업에서는 안면·지문인식, 출입 기록 등을 통해 근로시간을 측정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5인 미만 사업장, 혹은 자영업장 등에서는 전산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곳이 대다수다. 이에 정부는 근로 시간을 기록하는 애플리케이션(앱)을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실태조사와 시스템 구축이 이뤄지더라도 사회문화적 적응기도 필요하다. 오 연구위원은 “시스템이 마련돼 회사에서 적용하더라도 사람이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며 “절대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공짜야근 근절이나 휴식 보장 등 정부의 정책 취지대로 관행이 정착되려면 2~3년 이상 걸릴 것”이라며 “노사 두 집단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근로자별로도 의견이 갈리는 노동 정책의 특징을 잘 고려해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뉴스1) 조태형 기자 =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포괄임금제 악용 문제 방치하는 고용노동부 규탄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포괄임금제 규제 지침 발표를 촉구하며 피켓을 들고 있다. 2021.8.10/뉴스1 |
고무줄 판례가 낳은 ‘공짜야근’…”오늘도 자정 퇴근”
대한상공회의소가 2015년 ‘제2회 기업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으로 선정한 ‘아빠는 야근 중'(회사원 이재학씨 출품작). 늦은 밤 서울 도심의 한 오피스빌딩을 찍은 사진으로 야근하는 샐러리맨들의 생생한 모습을 포착했다. /사진제공=대한상공회의소 |
‘공짜야근’ 논란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포괄임금제는 법에 없는 제도다. 근로기준법상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정해진 근무시간 외에 몇 시간 더 일하는지와 상관없이 미리 정한 초과근무수당을 기본임금에 합해 지급하는 방식은 국회에서 입법된 적이 없다.
법에 없는 제도가 산업현장 곳곳에서 반세기 넘게 공공연하게 쓰이는 근거는 1970년대부터 포괄임금제를 기업의 관행으로 인정한 법원 판례다. 산업화의 길목, ‘과로사회’라는 낯설지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 초과근무를 사실상 용인하는 판결이 주를 이뤘다.
◇판례가 가이드…’특수직종만 적용’ 기준도 이제 갓 10년
1980~1990년대에는 ‘제반사정에 비춰 정당하다면’이라는 문구의 판결이 포괄임금제를 뒷받침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 해석이라 판사마다 다른 고무줄 판결이 포괄임금제 확산을 부추겼다.
법원이 포괄임금제 적용 기준을 다듬기 시작한 것은 이제 10년이 갓 넘은 수준이다. 2010년 전후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근로시간을 산정하기 어렵거나 근로시간대가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 직종을 중심으로 △노사 합의에 따라 △근로기준법이 정한 규제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에서 포괄임금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기준이 마련된 게 이 무렵이다.
포괄임금제 성립 조건을 노동시간 산정이 불가능한 경우로 한정한 대법원 판결은 2010년 5월 처음 나왔다. 대법원이 한 대학의 경비원이 포괄임금제에 반발해 학교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감시 업무처럼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포괄임금제 방식의 임금지급 계약은 허용될 수 없다고 판결하면서 하급심들도 대체로 이 법리를 따른다.
2017년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부는 광산 노동자 7명이 포괄임금 방식의 임금지급이 무효라며 연장·휴일수당 등을 광산업체에 청구한 소송에서 노동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포괄임금제로 책정된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노사간 묵시적 합의가 있다고 인정했던 판례가 뒤집힌 것은 2016년이다. 대법원은 그해 10월 사용자와 노동사 사이에 포괄임금제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포괄임금제를 허용한다고 판결했다.
◇”저녁이 있는 삶? 공짜야근의 삶”
지금까지의 판례를 바탕으로 판단하면 ‘노동시간 산정이 불가능한 경우’와 ‘사용자와 노동자가 명시적으로 합의한 경우’에만 포괄임금제가 가능하다.
문제는 법원의 이런 판례에도 불구하고 근로시간 산정이 어렵지 않은 사무직과 서비스업 등에서도 포괄임금제가 여전히 관행이라는 점이다. 특히 크런치모드(초강도 근무체제)와 과로사 논란이 제기된 IT·게임업계에서는 포괄임금제가 일상이다.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수 있는 업무나 근로시간 형태가 어떤 것인지 기준이 여전히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탓이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는 지난 한 달 동안 IT·게임업계 회사 111곳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84곳(76%)이 포괄임금제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이달 6일 밝혔다. 고용노동부의 ‘2020 포괄임금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포괄임금제 적용업체는 조사 대상 2522곳 중 749곳(29.7%)으로 나타났다. 사업장 규모별로 상시 근로자 수 10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의 30.3%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했다.
서울의 한 중소 게임업체 팀장급 직원인 이모(32)씨는 “오전 9시30분 출근, 오후 6시30분 퇴근을 조건으로 근로계약서를 썼는데 자정까지 야근은 기본이고 일이 몰릴 때는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일한다”며 “자정 넘어 퇴근해도 다음날 오전 11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고사하고 초과근무수당도 없는 ‘공짜야근의 삶'”이라고 말했다.
◇”재계약 때 따질 수 있나요”…정산제도 있어도 눈치
포괄임금제는 대기업보다는 상대적으로 근무여건이 팍팍한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에서 만연하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시급 1만원 시대’로 치닫는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 근무제의 여파로 인건비 등의 부담이 버거운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포괄임금제라는 ‘우회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고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은 초과근무수당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도 1~2시간의 초과근무를 따박따박 정산하기가 눈치 보인다.
수도권 부품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김모씨(33)는 “재계약이 코 앞인데 초과근무수당을 갖고 따질 수 있겠냐”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보기에는 주당 근무시간을 개편하려면 포괄임금제도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사진=홍봉진 기자 honggga@ |
국회에서 법으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포괄임금제는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한다는 원칙 아래 근로계약에 임금의 구성항목·계산방법·지급방법을 명시하도록 하고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하도록 한 법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다”며 “근로기준법으로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라고 말했다.
김홍영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포괄임금제는 판례법리로 체계화됐기 때문에 해석론으로 제도를 개선하기엔 한계가 있다”며 “궁극적으로 입법으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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