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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새벽부터 와있어”…늘어선 탑골공원 종이박스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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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20분부터 와있지. 물가도 많이 올라서 밥 얻어먹으러 나온 거야. 지금은 어디 가서 취직도 못 하고 돈이 없으니 사장도 못 하고, 웬만한 거 시작하려면 돈이나 까먹을 것 같아. 그냥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제일 행복한 거야. 일단은 건강하다는 거니까”(박철민 할아버지·78·가명·경기 의정부 거주)

6일 오전 7시30분께 찾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좌측 인도. 언제부턴가 이곳에는 사람은 없고 종이박스만 길게 놓인 줄이 생기고 있다. 무료급식을 받기 위해 노인들이 자신의 순서를 매겨놓은 박스를 놓고 가는 것이다. ‘신월동 41’, ‘외대 42’, ‘쌍문동 43’ 등 지역명과 번호를 적어놓은 박스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표시할 수 있는 ‘박 기사’, ‘차씨’ 등을 적어놓은 경우도 있다. 출근길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시민들도 궁금한지 박스를 놓는 노인에게 “이게 무슨 줄이에요”라며 물어보기도 했다. 바로 옆 도로에 세워진 관광버스에 탑승하던 외국인들은 버스에 오르는 것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김광석 할아버지(80·서울 강서구)는 “오전 6시에 화곡동에서 나와서 19번 박스를 놓았다”며 “여기서 도시락을 주면 저녁에 집에 가서 먹는다”고 말했다.

박스로 자리를 선점한 노인들은 탑골공원 뒤편으로 모인다. 오전 8시40분께 원각사에서 주는 아침 주먹밥을 받기 위해서다. 노인들은 하루에 두 끼 정도를 이곳에서 해결한다. 주먹밥과 미역국을 받은 박 할아버지는 다시 ’28번 의정부’ 박스로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박 할아버지는 ‘예전엔 어떤 일을 하셨냐’는 질문에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며 그간의 역사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박 할아버지는 1984년부터 버스 기사로 일을 하다 3년 전 직장을 관둔 후 적적함에 1년 전부터 이곳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을 묻자 그는 “아이들은 내가 여기 나오는 것을 몰라서 알면 난리난다”면서 “아이들이 못 나오게 할까 봐 서울에 나갔다 오겠다고 얘기하고 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이름 밝히는 것을 거절했다.

이곳에 나온 노인 중에는 박 할아버지처럼 끼니를 때우기 위해 경기, 인천, 멀게는 강원도 춘천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이곳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너무 멀리서 오는 거 아니냐’는 물음에 “노인은 지하철이 무료이기 때문에 밥 한 끼를 먹으러 멀리서 오는 것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심명우 할머니(70·경기 남양주)의 하루는 오전 4시부터 시작됐다. 오전 5시께 있는 첫차를 타고 덕소에서 이곳까지 6시에는 도착하기 위해서다. 집에서부터 지하철역이 멀어 중간중간 쉬면서 오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간다고 설명했다. 오늘은 12번째로 박스를 깔았다는 심 할머니는 “애들 아빠와 같이 살고 있는데, 몸이 많이 좋지 않아 지난해 9월부터 나 혼자 나와서 도시락을 받아 간다”고 전했다.

새벽부터 시작되는 경쟁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지난달 24일에 방문한 이곳에서는 앞쪽에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를 향해 “새치기를 한다”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주변의 만류로 다행히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심 할머니는 “자리 때문에, 밥 얻어먹으려는 것 때문에 맨날 싸운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는 자율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자칭 ‘자율질서팀’도 생겨난 모양이다. 박스 줄 중간에는 ‘이곳은 오시는 순서대로 자리입니다. 한 사람에 1개(박스)만 허용되며 새치기 등 약속을 어길 경우 퇴출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박스도 있었다.

대기 시간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교활동 시간이다. 이원흠 할아버지(70·가명·서울 동대문구)는 폐지를 가득 담아 리어카를 움직이는 박모씨(62)를 만나자 대화의 장을 만들었다. 박씨는 “내일부터 집을 나가게 생겨 사우나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고, 이 할아버지는 “아휴, 어쩌냐”며 “(박스 받는) 단골은 생겼냐”고 박씨의 안위를 걱정했다. 15년 동안 이곳을 오갔다던 할아버지는 그 세월만큼이나 아는 사람이 많았다. 20분 남짓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나가던 다른 할아버지와 장난기 가득한 손짓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원각사에서 제공하는 주먹밥을 받은 이 할아버지는 “잠시 집에 가서 주먹밥을 먹고 돌아오겠다”며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늦잠이라도 자는 날엔 공치기 일쑤다. 평소 나와 있던 친구가 오지 않자 김광석 할아버지는 전화를 걸어 “이제 일어났어? 그래 끊어”라고 하더니 “집에서 오는데 1시간30분 걸리는데 얘는 못 오겠다”고 주변 할아버지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오전 11시30분께 박스 주인들은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늦게 온 김말수 할아버지(76)는 배식이 이뤄질 때까지 서서 대기하다가 도시락은 받지 못하고 건빵과 물만 받았다. 이 시각쯤 받은 번호표는 210번대였다. 김말수 할아버지는 “오늘은 날이 좋아 사람이 많이 나왔나 보다”며 “인상이 좋으니 잘 될 거야”라는 덕담을 슬쩍 건네고는 서둘러 다른 무료급식소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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