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뜰까 불안의 ‘새로고침'”…韓서 전쟁 치르는 우크라인 ‘눈물’
재한 우크라이나인 로만 야마노프씨(35·왼쪽 가운데)와 콘스탄틴씨(52·오른쪽 아래 남성)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머니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정세진 기자 |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주 전에 한국에 온 할리나씨(26)에게는 전쟁 발발 이후 틈만 나면 인터넷 뉴스를 ‘새로고침’하는 습관이 생겼다. 우크라이나 현지에 있는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매일 전화해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일상이 됐다. 할리나씨의 어머니는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 중남부에서 군인들을 돕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친구들 중에선 입대해 전장에 나간 이들도 있다. 할리나씨는 “할 수 있는 게 이런 일이라 하고 있지만 솔직히 지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오는 24일이면 꼭 1년. 한국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전쟁 번아웃(신체적·정신적 탈진)’을 호소한다. 이들은 매일 아침 텔레그램과 페이스북, 외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이 지난밤을 안전하게 보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경기 화성에 정착한 지 15년째인 크리스티나 마이단츠크씨(36)의 지난 1년 일상도 그렇다. 마이단츠크씨는 지난 16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국제뉴스를 살피고 친구들에게 텔레그램으로 ‘괜찮냐’고 연락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과 뉴스를 체크하고 지인들이 안전한 장소에 있는지 확인해야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고 한다.
1년을 반복한 일상이지만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 리는 없다. 인터넷으로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을 확인하느라 일상에 집중하기도 어렵다. 이들에겐 앞으로 얼마나 더 지인의 부고를 접할까 두려워하며 아침을 맞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무섭다.
서울 강서구에서 무역회사에 다니는 로만 야마노프씨(35)는 “어느 날엔가 페이스북을 확인하는데 우크라이나 외국어대 시절 가입한 페이스북 페이지에 한 친구의 사진이 너무 많이 올라와서 봤더니 입대 후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며 “아주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펐다”고 말했다. 야마노프씨는 “아파트가 폭격당해 민간인이 사망하고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는 뉴스를 1년 동안 매일 보면 번아웃이 온다”고 밝혔다.
서울팝스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는 콘스탄틴씨(52)도 “핸드폰을 확인하는 게 가장 힘들다”며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국에선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혼자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끊임없이 이들을 괴롭힌다. 연세대 생명공학과에 재학 중인 흘립씨(21)는 “늘 불안하고 우울하다”며 “좋은 일이 있어도 마냥 기뻐할 수 없어 괴롭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23일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 인근에서 반전집회를 열고 있는 재한 우크라이나인들. /사진=페이스북 그룹 ‘한국의 우크라이나인들'(Ukrainians in Korea) |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아파트.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음. /사진=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식 텔레그램 채널 |
이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것은 동포들 덕이다. 지난해 2월24일 전쟁 발발 이후 나흘만에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근처에서 시작된 반전집회가 이들과 세상을 잇는 연결고리다. 콘스탄틴씨는 “20년 넘게 한국에 살고 있지만 전쟁 전에는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다”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모였다”고 말했다.
야마노프씨는 “힘들어도 인내심을 가지고 (반전집회에)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집회에 나와 울기도 하면서 공감하면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전쟁 발발 1년이 다 돼가면서 반전집회에 대한 관심이 조금 뜸해진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첫 반전집회 당시엔 참가자가 300명에 달했지만 최근 집회엔 10~15명 정도가 나온다. 매주 열던 집회도 2주에 1번에서 1개월에 1번 정도로 줄었다.
콘스탄틴씨는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며 “적극적인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할리나씨는 “한국과 우크라이나는 거리가 멀지만 어디에 있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내야 한다”고 밝혔다. 크리스티나씨는 “반전집회는 전쟁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거의 유일한 창구”라고 전했다.
반전집회에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한국인들도 집회에 참여한다. 연세대 국제대학원을 다니는 김현재씨(29)는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 지원활동에 전념했다”며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의 아픔이 지금 우크라이나가 겪는 아픔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더 많은 한국인이 이해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졸업증명서가 없어서”…우크라 피란 청소년들 ‘언어장벽’에 막막
재한 고려인 학생들이 지난 16일 오후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정세진 기자 |
지난 16일 오후 3시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 강의실에선 8살부터 17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 18명이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이들 중 6명은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한 피란 청소년이다.
고려인마을은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광주에 연고를 둔 고려인 후손 중 우크라이나를 떠나려는 피란민에게 항공권을 지원했다. 이달 5일까지 875명의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고려인 마을의 도움을 받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청소년문화센터 한국어 강의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엘레나도 고려인마을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 중 하나다. 엘레나는 둘째 오빠와 둘이 한국에 왔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고국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냈을 나이. 가장 힘든 게 뭐냐는 질문에 엘레나는 휴대폰 번역 애플리케이션(앱)을 켜 러시아어로 “언어장벽”이라고 답했다.
엘레나처럼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온 우크라이나 피란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어려움은 언어다. 엘레나도 한국 학생이라면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지만 아직은 한국어로 된 초등학생용 동화책도 읽기 어려워한다.
지난 16일 광주 월곡동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 한국어 수업을 듣던 우크라이나 피란민 엘레나양이 ‘한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뭐냐’는 질문에 휴대폰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언어장벽’이라고 답하고 있다./사진=정세진 기자 |
지난해 5월 입국한 우크라이나 출신 포로센코 티모르(12) 역시 광주 월곡동의 하남중앙초등학교를 다니다 이곳을 찾았다. 한국 학교에서 수업 받은 7~8개월 동안 수학과 영어 수업은 그나마 따라갈 수 있었지만 사회나 과학처럼 한국어 설명이 대부분인 수업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국어 수업을 맡은 교사 박토리아씨는 “학생마다 다르지만 한국어를 이해하는 것과 교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 또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이지현 고려인마을 바람개비꿈터공립 지역아동센터장은 “다음주에 초등학교 1학년 학생 7명이 새로 들어온다”고 말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상황 때문에 졸업 증명서가 없어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5월 고려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미아(15)는 인근 숭의과학기술고에 입학하려 했지만 중학교 졸업을 증명해줄 서류가 없어 올 3월에는 입학이 어렵다는 통지를 받았다. 미아는 “약사가 되고 싶지만 한국에서 대학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지난 16일 오후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청소년문화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정세진 기자 |
‘전쟁 1년’ 러시아도 두동강…”스톱 푸틴” vs”서구 책임”
지난해 9월 24일 서울 중구에서 재한 러시아인 예브게니 슈테판(52.왼쪽)과 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7.오른쪽)가 반전집회에 참여해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 제공 |
1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결정을 두고 재한 러시아인 사회가 분열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며 반전집회에 나선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 침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이들이 맞선다.
반전집회에 참여했던 예브게니 슈테판(52)·스타니슬라프 오소브스키(41)·미하일로바 아나스타시야(27)·알렉산드라씨(27)를 지난 17~1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푸틴 대통령의 침공을 지지하는 재한 러시아 단체 관계자과는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테러 위협에도 반전 목소리 못 접는 이유는
지난해 9월 21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부분적 동원령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사진=뉴스1 |
반전집회를 이어가는 이들은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러시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소브스키씨는 “독일에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히틀러는 그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으로 반전 목소리를 내는 게 쉽지는 않다. 지난해 여름엔 서울 마포구 홍익대에서 반전집회 중인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다가와 욕설을 하며 영상을 촬영해 경찰이 제지하는 일이 있었다. 반전집회에 참여하는 러시아인은 러시아대사관이 자신들의 정보를 수집한다고 의심한다.
러시아에선 당국이 직접 나서 반전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을 상대로 집회 불참을 종용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난해 9월21일 푸틴 대통령이 예비군 부분 징집을 발표한 뒤 대규모 주말 집회를 앞두고 러시아 경찰이 집회 참여 예상자의 집을 점검했다고 한다.
2021년 한국에 온 뒤 반전집회에 꾸준히 참여한 알렉산드라씨는 “당시 경찰의 요구에 따라 내가 러시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서류를 어머니가 작성해야 했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에서 반전집회 중인 재한러시아인에게 러시아인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다가와 욕설을 하며 영상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예브게니 슈테판 틱톡 |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전집회에 참여하는 러시아인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할 각오도 불사해야 할 판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검찰청은 지난해 9월 미허가 시위에 합류하거나 합류를 촉구하면 최고 징역 15년형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같은 해 2월 푸틴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자국민을 ‘배신자’로 규정하며 국민이 서로의 감시자가 돼 배신자를 신고해달라고 촉구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아나스타시야씨는 “러시아에 있는 친구 남편은 동원령에 징집돼 군에 입대한 뒤 탈영해 연락이 끊겼다”며 “러시아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려고 해도 무서워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침공을 반대하는 1인시위 중인 스타니슬라프 오소브스키. /사진제공=스타니슬라프 오소브스키 |
◇ “러시아엔 어쩔 수 없는 선택, 우크라 전쟁은 서방의 책임”
지난해 서울 명동에서 반전집회 중인 알렉산드라씨(27,오른쪽)와 재한 러시아인. /사진=예브게니 슈테판씨 제공 |
재한 러시아인 중에는 푸틴 대통령의 선택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한 러시아인 단체 관계자는 “우크라이나에도 러시아인이 많이 살고 있다”며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비극이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에는 서방의 관점에서 보도되는 뉴스가 대다수지만 전쟁의 책임은 서방국가에 있다”고 덧붙였다.
반전집회에 참가해온 슈테판씨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푸틴을 지지하느냐는 러시아에서도 논쟁적인 사안”이라며 “지지하는데 무서워하는 건지 싫어하지만 표현을 못 하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푸틴을 믿고 미국이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탓하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편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에 체류 중인 러시아인은 2만5374명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반전집회 중인 재한 러시아인들. /사진=사진=예브게니 슈테판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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