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척 당근 사면 편한데 더 비싸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려고 늘 흙이 묻은 당근을 사요.”
서울 노원구에서 그룹홈을 운영하는 석혜영 원장이 지난 9일 한 마트에서 흙 묻은 당근을 집게로 집으며 말했다. 할인마트 식용유 판매대로 이동한 석 원장은 2만원으로 오른 올리브유를 보고 멈칫하더니 더 저렴한 포도씨유를 카트에 담았다.
그룹홈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과 청소년을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돌보기 위한 소규모 아동복지시설이다. 석 원장의 그룹홈에서는 7세부터 20세까지 5명의 아이가 함께 생활한다.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이다.
서울 노원구 소재 석혜영 원장이 운영하는 그룹홈. 그룹홈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과 청소년을 가정과 같은 곳에서 돌보는 소규모 아동복지시설이다./사진=최지은 기자 |
석 원장 그룹홈의 운영비는 아이들 앞으로 다달이 나오는 생계비 62만원과 주거비 19만8000원, 정부 운영 보조금 47만원과 후원금이다. 생계비 62만원으로 아이들 학원비와 교통비, 생필품비 등을 해결해야 한다.
석 원장은 올해 가파르게 오른 물가에 허리띠를 더 졸라맸다. 마트에 가는 날이면 전단을 펴놓고 물품마다 어느 마트가 싼지 비교해 한번에 2~3곳의 마트에 들린다.
“아이들이 딸기를 좋아해요. 지금은 철이라 값이 싸졌는데 얼마 전까지 너무 비싸더라고요. 한 팩 사서 5명에게 나눠주는데 어찌나 미안하던지…”
다른 그룹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남 양산에서 그룹홈을 운영하는 한미나 원장은 “원래 카레에 재료를 7가지 정도 넣었는데 요즘은 5가지밖에 못 산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20만~30만원이었던 식비는 올 들어 40만원대로 뛰었다.
서울 노원구에서 그룹홈을 운영하고 있는 석혜영 원장이 할인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석 원장은 “이 카트에 있는 게 이틀이면 동이 난다”고 설명했다. 물가가 치솟아 한 번 마트에 갈 때 2~3곳에 들러 가장 싼 물품을 구매한다./사진=최지은 기자 |
그룹홈에는 상처나 결핍을 가진 채 입소하는 아이들이 대다수다. 석 원장은 “한 아이가 ‘계속 먹어도 배가 고파요’라고 했다”며 “마음이 불안하니까 먹을 걸로 채우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배고플 때마다 언제든지 먹으라고 간식거리를 가득 사놓는데 이제 과자 하나도 2000원이 넘어간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석 원장의 그룹홈은 지난해 6월 월셋집으로 이사했다. 이전까지는 석 원장이 소유한 집에서 생활을 했는데 사정이 생겨 집을 처분했다. 당시 집값이 한창 오르던 때라 새 집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 앞으로 나오는 주거비를 모두 더해도 100만원대의 월세와 가스비, 관리비를 감당하기엔 부족하다. 올해부터 가스비가 오르면서 부담이 더 커졌다. 지난달에는 가스비로 25만원, 관리비로 30만원을 썼다.
한 원장은 “지난해 난방비가 가장 많이 나왔을 때가 20만원 후반대였는데 올 1월에는 38만원이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 소재 석혜영 원장의 그룹홈 방 한 칸은 사무실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행적 서류 처리, 후원금 개발 등이 이뤄진다. 아이들을 양육하기에도 시간이 빠듯할 정도로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사진=최지은 기자 |
석 원장이 운영하는 그룹홈 방 한 칸에는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석 원장과 보육사 3명이 행정 업무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한 서류 작업과 후원금 모금 업무가 이뤄진다. 하지만 아이들을 보육하는 데도 시간이 빠듯한 터라 후원금을 모집할 여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시설 규모가 작다 보니 홍보 효과를 기대하는 기업에서는 후원을 꺼린다. 석 원장은 “지원 사업도 신청하고 후원금 모금을 위해 백방으로 뛰지만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이준섭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 사무국장은 “그룹홈은 24시간 365일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시설장 1명에 보육사 3명이 있어도 보육하다가 시간이 다 간다”며 “여기에 갖가지 행정 서류 처리와 후원금 모금까지 이뤄져야 하니 일손이 부족한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석 원장은 책상에서 서류 1장을 꺼내 보여줬다. 아이들이 용돈을 수령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금액과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해둔 서류다. 7살 막내도 고사리손으로 이름을 적은 뒤 용돈을 받아 갔다. 석 원장은 “일반 가정집에서 아이들이 용돈 받아가면서 서류에 서명하지 않는데 이런 것마저 기재해야 하니 일이 많다”고 말했다.
겉보기에 그룹홈은 일반 가정과 다르지 않지만 정부가 요구하는 행정 기준이 까다로워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도 서류를 남겨야 한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소재 그룹홈의 아이들이 직접 서명한 용돈 수령 내역./사진=최지은 기자 |
보육과 행정 업무, 후원금까지 지칠 법도 하지만 석 원장은 웃으며 “이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특히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뭉클하다고 한다.
“아이 한 명을 놓고도 보육사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보육사 선생님들과 한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니 아이들이 바뀌는 게 눈에 보여요. 아이가 변화하는 걸 보면 신기하죠.”
아이들에게도 그룹홈 사람들은 ‘가족’이다. 석 원장은 “한 아이가 ‘우리 모두 가족이잖아요’ 하더라”며 “혈연으로 맺은 관계는 아니지만 가족인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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