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정치, 그날엔…’은 주목해야 할 장면이나 사건, 인물과 관련한 ‘기억의 재소환’을 통해 한국 정치를 되돌아보는 연재 기획 코너입니다.
2014년 7월14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새누리당을 2년간 이끌 새로운 당대표에 비박계(비박근혜계) 좌장인 김무성 후보가 선출됐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그렸던 정국 구상은 어그러졌다. 김무성 대표 체제의 출범은 여당이 박근혜당(黨)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을 알린 사건이다.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친박(친박근혜계) 황우여 대표 시절 안정적인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황우여 대표는 대선을 치르기 전 취임한 인물이다. 2014년 7월 전당대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당 대표 선출 행사인 셈이다.
대통령 취임 1년 5개월 만에 열리는 여당 대표 경선. 박근혜 대통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고려할 때 이른바 박심(朴心)을 표방하는 후보가 유리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대통령 임기 초반에는 청와대 의중을 잘 반영하는 여당 대표가 필요하니 친박 후보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실제로 친박계 좌장 서청원 후보가 출사표를 알리면서 여당 대표 선거 구도에 격랑을 일으켰다. 서청원 후보가 직접 나선 것은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청와대와 찰떡 호흡을 과시하는 여당 대표의 탄생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국 구상과 맞닿아 있다.
이는 서청원 후보의 패배가 청와대의 정치 리스크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퇴로를 열어두지 않고 결사항전의 자세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선거,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그런 대결이었다.
문제는 김무성 후보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이다. 정치인 김무성은 한국 보수정당 계보를 이어받는 정치인 가운데 가장 많은 계파 의원을 거느린 인물로 손꼽힌다. 김무성계의 파워는 막강했다.
정치인 김무성은 원조 친박으로 불릴 만큼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웠던 인물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것도 정치인 김무성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대선 이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이 드러났다.
새누리당 정권 출범을 위해 대선에서 하나로 힘을 모으기는 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소원해진 박근혜-김무성의 관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느새 정치인 김무성은 비박의 좌장으로 불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치인 김무성은 체질적으로 2인자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 보스형의 정치인이라는 얘기다. 말 잘 듣는 여당 대표를 원한다면 정치인 김무성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반면 서청원 후보는 친박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토대로 박근혜 대통령 곁을 책임질 여당 대표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대표 경선과 관련해 민심과 당심 모두 심상치 않았다. 정치인 김무성의 벽은 강하고 단단했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도 변화를 갈망했다. 청와대 2중대 노릇보다는 자체적으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실질적인 여당의 역할을 기대했다. 비박 좌장 김무성은 그런 바람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정치인 김무성은 박근혜 정부 첫 여당 대표 선거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29.6%의 득표율을 얻으며 21.5%를 얻는 데 그친 서청원 후보를 8.1% 포인트라는 여유 있는 격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3위는 14.2%를 얻은 김태호 후보, 4위는 11.7%를 얻은 이인제 후보가 차지했다. 김을동 후보는 8.2%를 얻었지만, 여성 최고위원을 최소 1명은 배치한다는 선거 규정을 토대로 지도부 막차를 탔다. 새누리당 대표 선거 결과는 정국을 흔드는 변수였다. 여당 당권이 비주류 손에 넘어가면서 당·청 관계는 변화가 불가피했다.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
김무성 대표 메시지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청와대는 결이 맞는 여당 대표를 희망했지만, 당원과 민심은 제 목소리를 내는 여당 대표를 원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2년 차에 맞이한 여당 지도체제 개편. 이는 민심의 바다에 거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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