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서기 1394년,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 4월 20일 기록이다.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한 가지 골치 아픈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전 왕조인 고려의 국성인 왕씨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과 창왕은 이미 죽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은 원주를 거쳐 간성에 유배된 상태였다. 그리고 수백 년간 고려를 지배한 국성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왕씨들이 궁중과 도성인 개경이 남아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이들에 대한 별도의 처리를 할 계획이 없었다. 어차피, 왕까지 폐위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들이 별다른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밑의 신하들은 생각이 달랐다. 새로운 왕조가 더욱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확하게는 자신들의 배신이 뒤탈 없이 끝나기 위해서는 약간의 빌미나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제까지 충성을 다했던 고려의 마지막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그야말로 집요하게 이성계에게 왕씨들을 모두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사헌이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 공로로 좌명공신에 책봉된 남재는 왕씨들을 모두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섬에 가둬놓고 감시해서 다른 마음을 못 먹게 한다는 구실이었다. 이성계도 이 정도는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승낙했고, 전부 다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수의 왕씨들이 두 섬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오히려, 두 섬에 있던 왕씨들을 모두 육지로 옮기게 하는 조치를 취한다. 조선이라는 국가를 세운 이성계 입장에서는 굳이 더 피를 볼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밑의 신하들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사건이 발생한다. 서기 1394년 1월 16일,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째 되던 해,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이 체포된다. 염장관은 소금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일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관리였다. 두 사람은 오늘날의 밀양인 밀성에 사는 장님 점쟁이 이흥무에게 점을 쳤다가 발각된 것이다. 점을 친 게 체포될 정도의 일인가 싶지 만 문제는 두 사람이 친 점의 내용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이흥무에게 유배를 간 공양왕의 명운이 이성계보다 좋은지, 그리고 왕씨 중에 명운이 좋은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이흥무는 공양왕의 명운이 이성계보다 좋은지에 대한 답변은 안 한 것 같았는데 왕씨 중에서는 남평군 왕화의 명운이 가장 귀하고, 그 아우 영평군 왕거가 다음이라고 말해주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무속은 여러 분야에서, 특히 정치에서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다. 14세기 조선에서는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다. 두 사람이 역모를 꾸미기 위해서 이흥무에게 미리 점을 쳤을 수 있다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가담자가 밝혀진다. 바로 대마도 정벌의 영웅 박위였다. 이성계의 측근으로 알려진 그가 가담했다고 알려지자 조정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힌다. 자신들이 걱정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며 더욱 더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몇 달 동안 왕씨들을 처분해야 한다는 상소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이자 결국 이성계는 항복하고 만다. 결국 석 달 뒤인 4월에 관리들의 의견을 말하라는 식으로 발을 뺀 것이다. 서운관을 비롯한 몇몇 관청의 하급 관리들이 섬으로 유배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관리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조시대답지 않게 다수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왕씨들의 운명은 비극으로 정해지고 만다. 중추원 부사 정남진과 형조 의랑 함부림을 삼척에 보내고, 형조 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을 강화도에 보내고, 형조 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을 거제도에 보냈다. 이들에 의해 강화도와 거제도, 그리고 삼척에 나눠서 지내던 왕씨들은 모두 몰살을 당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외가 쪽 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연구자들은 이때 이성계에게 협력하거나 혼인으로 이어진 소수의 왕씨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씨 남성들이 죽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숫자는 대략 130여 명에서 150여 명으로 보고 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옥씨나 노씨 같은 성씨로 살아가게 된다.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김가행과 박중질, 그리고 점을 쳐 준 이흥무를 비롯해서 이들이 언급한 왕씨들은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오직 박위만이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파직되는 선에서 그치고 살아남았다. 가장 위험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박위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음모론도 존재한다. 이성계가 꿈쩍도 하지 않자 측근인 박위가 총대를 매고 일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말이다. 박위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를 지키다가 죽음을 당할 정도로 충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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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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