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53.9%’라는 숫자였다. 대한민국 등록 장애인 중 53.9%가 65세 이상이다. 이는 고령화와 장애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취재팀은 고령 인구의 건강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장애인과 돌봄 가족, 의료진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스피커를 달았다. 고령 장애인의 삶은 우리 사회 의료와 복지 패러다임의 과감한 전환을 촉구하는 신호였다. [편집자 주]
한국은 1977년 의료보험을 도입한 후 1989년 전(全)국민 건강보험을 조기에 정착시켰다.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진료비를 낮게 책정(저수가 정책)했고 병원들은 수익 확보를 위해 환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2020년부터 3년 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외국의 유수 언론들은 “한국은 저렴한 의료비, 높은 의료 접근성, 체계적비용 관리로 팬데믹을 잘 극복하고 있다”며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를 극찬했다.
하지만 고령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과 보건 정책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건강보험제도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60~70세까지만 살아도 장수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만들어져 전체 인구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면서 제도의 재설계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한다.
초고령 사회에는 맞지 않는 이유 3가지
① 행위별 수가제 맞나?
노선자(80) 씨는 70대 초반 골다공증으로 장애 판정을 받았다. 또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지병도 늘고 있다. 노 씨는 골다공증 치료로 A 병원, 당뇨병, 고혈압 치료로 B 병원을 다닌다. 딸이 지어준 C 한의원의 한약도 먹는다. 노 씨는 “건강보험 적용으로 약값이 부담스러운 편은 아니다. 다만, 매일 챙겨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일차의료와 만성질환 관리 분야 권위자인 이재호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고령 장애인의 의료 이용 행태를 두고 한마디로 ‘참사’라고 표현했다. 이 교수는 “고령일수록 만성질환이 많고 잔병이 잦은 탓에 필요한 의료 서비스가 많아진다”면서 “이를 제대로 관리하는 주체(주치의)가 없다 보니, 환자를 제대로 진료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중복 치료와 과잉 진료, 과잉 치료, 약품의 낭비, 특히 항생제 오남용이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건강보험제도는 행위별 수가제로 운영된다. 진료행위마다 항목별로 수가를 책정하니, 의료기관이 과잉 진료를 유발하고 이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고령 인구의 증가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 가능성은 지표로도 나타난다. 2023년 기준 건강보험 진료비는 전년 대비 4.7% 증가한 약 110조 8000억 원이었는데, 인구 비중으로는 약 18.4%인 65세 이상 인구의 진료비는 약 49조 원(전체 진료비의 44.1%)에 달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만성질환 진료비는 약 90조 원으로 전체 진료비의 84.5%를 차지했는데, 이 역시 고령 인구 비중 증가와 관련이 크다.
② 병원 중심 의료 모델 맞나?
현재 건강보험제도는 병원 중심의 치료 모델이다. 의료법에 따라 의료인은 개설한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도록 규정돼 있어 왕진도 원칙적으로는 불법이다. 의료보험제도 초기, 의료의 질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병원 중심의 모델이다 보니,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만성질환 관리, 장기요양, 지역사회 돌봄 서비스 강화 같은 요구를 반영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게 의료진들의 설명이다. 고령기 장애 발생도 급성기 치료 이후 재활 등 노인 환자를 위한 적절한 의료 서비스가 부족한 탓이 크다.
윤종률 한림의대 가정의학 명예교수는 “현행 의료체계는 질병 중심의 분절적 의료를 제공하고 있어, 포괄적·연속적·조정적 의료가 필요한 고령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면서 “가정과 1차의료, 노인전문의료, 방문의료, 간호, 재활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고령자 친화 의료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승현 루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구진은 2023년 12월 연구보고서를 통해 “지역 병·의원과 파트너십을 통해 복지보건의료 네트워크 대응체계를 구축한다면, 다직종 전문가팀이 응급상황과 낙상 등에 즉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③ 복지 신청 주의 맞나?
김예진(가명·32) 씨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3년 전 교통사고로 전두엽이 크게 손상된 어머니를 돌보는 삼남매 중 장녀다. 김 씨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입은 어머니의 장애 판정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주 7일 중 6일을 아버지 돌봄에 매여 있는 상황에서 대학 병원, 재활병원, 구청, 동사무소 등에서 필요한 서류를 떼느라 시간을 보냈다. 장기요양 관련 의사소견서, 등급 판정 결과를 위한 서류 준비, 기초연금 수급희망 이력관리 및 사회보장급여 신청서 작성하는 일도 어려웠다. 김 씨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라면서 “세 남매가 나눠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는 장기요양등급(1~5등급, 인지지원 등급)을 받아 세면, 구강 관리, 빨래, 식사, 머리 단장, 외출 동행 등의 서비스를 정부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다. 국민건강관리공단은 장기요양보험료와 건강보험료를 통합, 징수해 재원을 마련한다.
한국 복지 제도는 기본적으로 ‘신청주의’이다. 개인이 직접 신청하지 않으면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장기요양등급도 신청해야 받을 수 있는데, 저학력자, 노인, 일용근로자 등은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신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독거 노인의 비율은 전체 노인의 32.8%다. 가족이 없으면 의료 및 복지 접근성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영국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반으로 전면적인 공공 의료 체계를 구축했으며, 모든 의료기관을 국가가 관리하고 운영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반면 미국은 자유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민간 보험 중심의 의료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한국은 1977년 북한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의료보험을 급하게 도입돼, 일종의 사회보험 체계로 운영되고 있다.
우봉식 아이엠재활병원 원장(전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은 “초기에는 500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형태로 출발했고, 낮은 보험료와 낮은 급여, 저수가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게 됐다”며 “필연적으로 과도한 규제, 징벌적 조치, 그리고 포퓰리즘적 의료 정책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령 인구의 증가로 건강 보험 재정이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근본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단 7년만에 진입한 한국의 상황은 일본과 가장 닮았다”며 “일본의 건강보험제도를 제대로 벤치마킹해 ‘한국형 건강보험제도’를 완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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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2.0 설계를 위한 제언
① 주치의 제도
이재호 교수는 “한국도 미국, 유럽 등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제도적으로 일차의료 기관과 주치의를 운영한다”고 주장한다. 일차의료는 동네 의원이나 보건소에서 경증 진료와 건강검진, 예방접종 등 의료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며 일차의료의 역할이 약화한 실정이다. 주치의 제도는 각 환자 또는 가족이 특정 의사를 주치의로 지정해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건강관리와 상담을 받는 것이다.
윤종률 한림대 의대 가정의학과 명예교수는 “가령 혈압과 혈당 수치가 잘 관리되고 있는데 환자가 왜 점점 힘들어하는지 지금과 같은 분절적 의료 체계에선 알기가 어렵다”며 “주치의 한 사람이 관리하면 환자 개인의 변화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상범 서울신내의원 원장도 한국이 벤치마킹해야 할 일본의 좋은 제도로 ‘단골의사제(かかりつけ医制)’를 꼽았다. 이 제도는 특정 의사가 환자를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로, 주치의 제도가 일본 의료 환경에 맞게 발달한 것이다.
일본의 단골의사제는 1차 의료와 전문 의료의 연계를 통해 환자 중심의 지속적 관리를 통해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의료비 절감 효과도 거뒀다는 게 이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단골의사를 활용하는 병원과 장애인 모두에게 의료비를 일부 삭감하는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한다면 제도 정착이 빠르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2018년 5월부터 장애인을 대상으로는 건강주치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2024년 10월 기준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이 제도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5255명, 등록주치의는 765명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등록주치의 중 실제 활동하는 주치의 비율은 15%도 안된다.
이재호 교수는 “장애인주치의제도라하면 장애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주기적으로 쉽게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며 “실상은 여기 참여하는 의사와 의료기관이 매우 적어 장애인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② 지역 포괄 케어 시스템
일본은 2003년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면서 재택 의료 및 지역 포괄 케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일본 지역 포괄 케어 시스템의 핵심은 환자가 어느 곳에서든 쉽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예방적 건강관리 활동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우 원장은 “가령 일본은 노인들에게 정기적인 건강 교육과 운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건강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면서 “이러한 예방적 의료 모델을 적극 도입해야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 건강한 노년층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➂ 정액제 수가 부분 도입
일본은 또 DPC(진단절차 결합·Diagnosis Procedure Combination) 제도를 도입해 행위별 수가와 정액제 수가를 조화롭게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의료 비용 증가를 통제하면서도 의료 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 원장은 “한국의 신포괄수가제는 일본의 의료 제도를 벤치마킹하면서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특히 의료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과 병상 조절 정책이 미비해 의료비 증가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병상 정책 문제다. 병상 수가 많으면 병원이 이를 채우기 위해 환자를 유치하게 되며, 이는 의료비 증가로 이어진다. 한국은 2022년 OECD 평균 의료비 지출을 초과했으며, 의료비 증가 속도가 빠른 국가 중 하나다. 일본은 병상을 전략적으로 조절하며 의료비 증가를 통제했지만, 우리나라는 별다른 계획 없이 병상 수를 계속 늘려가는 실정이라는 게 우 원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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