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이 틀 밖의 소식인 것은 애초에 틀이 없기 때문이다.예술이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틀이 틀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은 틀이 없기에 허공을 나는 새의 종적 없음과 같다. 흔적이 없어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곳에 예술이 있다. 찾는 놈이 사라지고 모르는 놈만 남을 때 문득 알수없음의 광야가 펼쳐진다. 호기심만이 가득한 예술의 신천지, 오로지 모르는 놈조차 사라졌기에 모든 것이 살아있음이다.”
금산갤러리에서 27일부터 3월 20일까지 개인전을 갖는 김근중 작가의 선시(禪詩)같은 예술론이다. 선시는 선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짤막한 율문으로 나타낸 시를 말한다. 작가의 50년 화업의 통찰이라 하겠다. 이번 개인전의 타이틀은 ‘Natural Being- There or Here(존재–그곳 혹은 이곳)’이다.
“인간은 사회화되면서 온전한 주체에서 분열된 주체가 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언어에 갇히면서 본래의 충족된 자연적 존재에서 이성화된 분열된 주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은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규범과 틀을 강조하고 본능을 금기하고 억압해 왔다. 규범과 법규는 선이요, 이것을 위반하는 것은 광기의 악으로 규정해 옴으로써 내적억압으로 은폐되어온 욕망은 내가 아닌 ‘그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으로 가서 거기에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존재 바깥에 있는 낯선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핵심에 자리 잡은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풀어본다. 금기와 억압으로 인한 결핍에 의해 자라난 욕망은 나라는 주체의 일부이므로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가 없기에 예술이 필요한 것이다. 예술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간에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숨구멍과 같다. 사회화된 규범이 원하는 승화는 진정한 승화가 아니다. 그것은 반쪽자리 승화일 뿐이다. 라깡의 말처럼 죽음의 충동으로써 틀을 깨고 벗어날 때 이성과 본능이 아우러진 진정한 승화의 희열이 구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진정한 내적 평화를 이뤘을 때 우리는 이것을 일러 중도라 부른다. 전통회화에서는 이처럼 구각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자유를 얻었을 때, 파격(破格)이니 일품(逸品)이라는 말로 칭송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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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주제 There or Here(그곳 혹은 이곳)란 우리들이 찾고 있는 마음의 고향은 선악의 분별심에 의해 어느 선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 즉 이성과 본능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바로 중도(中道)의 마음자리를 말한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드로잉, 추상화, 단색화를 보여준다. 작품들은 삼라만상 나아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과 관계하며 형성된 ‘나’라는 존재의 의식과 무의식의 지층에 대한 사유와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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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수많은 존재와 현상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들이 화면 위에 색이라는 물성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첩되고 벗겨지고, 칠하고 지우고 또 칠하고, 있음과 없음으로 무수하게 반복되는 수 많은 색과 흔적들은 바로 우리 존재들의 생성과 소멸의 서사시며 역사임과 동시에 진면목이다. 나아가 나란 존재의 실존이 펼쳐지는 장(場)인 것이다.
그의 드로잉은 주로 작은 종이 위에 연필, 목탄, 오일 파스텔 등으로 제작되고 있다. 드로잉주제는 ‘존재’ 또는 ‘그곳 혹은 이곳’이다.
추상화는 캔버스 위에 아크릭 또는 오일로 제작되고 있다. ‘꽃, 이전’ 혹은‘그곳 혹은 이곳’이라는 타이틀처럼 풍경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한 모호하지만 무엇인가를 상징하고 있는 색면추상이다. 관조적 사유와 무위적 즉흥성을 함께 넘나들면서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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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는 역경 귀장론(歸藏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귀장은 은나라때 땅을 중심으로 만든 역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땅에서 낳아 땅으로 돌아간다. 좋은 것도 돌아가고 나쁜 것도 돌아간다. 만류귀종(萬類歸宗) 즉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듯 그 하나에는 선악이란 흔적조차 없다.
이번 전시에서는 비단과 같은 담백하고 관조적 느낌을 살린 작품들을 새롭게 선보인다. 캔버스 위에 석고붕대를 붙힌 다음 흰 바탕위에 원하는 색상을 묽게 풀어 수없이 반복을 하며 완성해 나간다. 마치 관조적 정수만을 남기는 것으로 문인화의 정신, 선비정신을 엿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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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신몽유도원도이다. 캔버스 위에 돌가루를 수차례 바르며 원하는 마티에르를 만들고, 안료를 어두운색부터 밝은색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발라 말린 다음, 물을 뿌려가며 수세미로 갈아낸다. 원하는 색상과 텍스츄어가 나올때까지 색을 바르고 벗겨내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런 장인적 인고의 과정은 ‘몸’을 소환하고 있다.
“대량생산이 쉽고 빠르며 혁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정성, 열정, 애정과 고민을 깃들게 하는 ‘몸’을 잃어가고 있다. 모든 것들이 디지털화되고 기계화된 시대에 ‘몸’의 씀은 진정한 경외심을 재발견해주게 된다.”
그는 늘 새로운 땅 광야를 찾아나서는 방랑자이기를 자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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