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총괄하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한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과 업종별 기업인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최소 10억달러(약 1조4천억원) 이상 투자해야 미 정부의 지원이 가능하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 상의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대미 통상 아웃리치 사절단’은 지난 21일 오전(현지시각) 러트닉 장관 취임 선서식에 앞서 러트닉 장관을 40여 분간 따로 만났다.
러트닉 장관은 이 자리에서 사절단에게 미국 제조업에 가능한 한 많이 투자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한 우리 기업인이 수천만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소개하자 ‘최소한 10억달러의 투자를 원한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10억달러 투자부터 미국 정부의 다양한 지원이 가능하니 그 정도를 하면 좋겠다고 설명하는 취지였다고 동석한 소식통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우선주의 투자정책’ 관련 각서에서 동맹의 대미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객관적인 기준에 입각한” ‘패스트트랙'(fast-track) 절차를 신설하겠다며, 10억달러를 넘는 대미 투자에 대한 환경 평가를 신속히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트닉 장관 선서식 뒤 이 각서에 서명했다.
러트닉 장관은 우리 기업인에게 이 정책을 설명하며 10억달러라는 기준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러트닉 장관은 사절단에게 10억달러 미만의 투자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가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또 대미 투자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내야 한다는 입장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투자를 약속하면 당장 1년안에 착공과 같은 구체적인 추진을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해 기업이 투자를 약속만 하고 시간을 끄는 것은 용인할 수 없음을 시사했다.
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관세 문제도 논의됐지만, 러트닉 장관이 관세로 우리 기업들을 압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참석한 관계자들이 전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21일 워싱턴DC의 한 호텔에서 열린 ‘트랜스퍼시픽 다이얼로그'(TPD) 행사장에서 우리나라 취재진과 만나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상호 관세에 대해 “제가 협상할 것도 아닌 거 같아서, 한국 정부가 와서 얘기하게 될 거라고 (미국 측에) 전했다”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협상에 나설 때 한국 정부에 전달할 협상 전략이나 당부 사항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있다.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다”며 “그리고 협상은 잘해야 한다”고 답했다.
대미 투자 계획에 대한 질문에는 “검토는 계속할 것이다. 비즈니스라는 게 필요한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기업도 ‘트럼프 시기에 얼마를 하겠다’고 생각하며 다가가지 않고, 이게 내 장사에 얼마나 좋으냐 나쁘냐를 얘기한다”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에 생산 시설을 좀 더 원한다고 얘기하지만, 우리는 인센티브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계속 (미국이) 세금도 내리겠다고 얘기를 하는데 아직은 뭐가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지 않나. 그러니까 좀 더 지켜봐야겠다”며 “그래야 계획을 짜거나 뭘 하는데 반영을 시킬 수 있는데 지금은 아직 뭐가 나온 게 없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미국 측의 인센티브가 세금 인하 등 전향적 태도 변화를 의미하느냐고 묻자 “꼭 돈만 갖고 따지는 게 아닐 수 있다.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인센티브가 있을 수 있다”며 “한국과 미국이 같이 해서 서로 좋은 것을 하는 게 지금 필요하다”고 답했다.
또 “살 때는 더 싼 걸 사고 싶어 하고, 팔 때는 내걸 많이 파는 그런 관계만 있으면 상당히 삭막한 관계다. 이제는 단순히 상품 수출만으로 계속 먹고 살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며 “같이 활동해서 서로 시너지를 얻는 빅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해야 대한민국도 지금 같은 트렌드 파도에 잘 탈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기업들은 트럼프 집권 1기부터 전임 조 바이든 행정부 시기까지 8년에 걸쳐 약 1천600억달러(약 230조원) 규모를 미국에 투자했다.
한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전임 바이든 정부에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및 반도체법에 따라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을 폐지하거나 재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최 회장은 “내가 얘기할 건 아닌데, (이번 방미 기간에 만난 미국) 정계 인사 중 한 분이 ‘그거는 계속 집행이 잘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우리는 그런 정책을 갖고 있다. 약속을 해서 미국이 좋은 건데 그걸 왜 안 하느냐’고 말했다”며 “실제 그것도 미국이 자기네 실리를 따져서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조건 ‘준다, 안 준다’ 이렇게 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번 민간 경제사절단의 방미 성과에 대해 최 회장은 “가능하면 그들(미국 측)이 흥미로워할 얘기를 한다는 계획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성과가 있었다”며 “같이 해서 서로 좋은 얘기가 있어야 되는 것을 준비해왔고, (미국 측이) 6개 분야를 다 상당히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대한상의가 준비한 6개 분야는 조선, 에너지, 원자력, AI·반도체, 모빌리티, 소재·부품·장비 등이다.
사절단을 만난 한 백악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20여개의 경제사절단을 만났으나, 이번 한국 민간 사절단과의 논의가 가장 생산적이었다”면서 향후 추가 논의를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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