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저 바닥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다.
(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
-리처드 파인만 (1959)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미시(微視) 세계’는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세상이다. 원자 단위의 나노미터(nm)부터 미세먼지, 각종 유기물 분자가 미시세계에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세상의 변화를 관측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미생물(microbe)’이 구축한 미시세계는 한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인 ‘남극’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엔 얼음과 메마른 자갈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극 대륙은 수많은 미생물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극지연구소(KOPRI)’에 따르면 현재 남극에는 수만 종 이상의 미생물이 서식한다. 이들은 먹이사슬 유지와 탄소순환 등 남극 생태계 전반을 지탱하는 대들보다.
하지만 최근 남극 미생물 환경은 ‘기후변화’의 영향에 노출돼 있다. 남극의 빙하는 지구온난화로 해마다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다. 이로 인해 주변 바다, 땅의 성분 불균형도 커졌다. 유진선 충북대학교 환경미생물학 연구실 메탄산화팀 연구원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은 것도 기후변화로 인한 남극 미생물 활동을 관찰하기 위함이다.

◇ 무너지는 ‘빙하’, 남극 미생물 생태계도 흔들린다
기자가 남극세종과학기지에 머물던 지난해 12월,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울렸다. 기지 인근에 위치한 ‘마리안 소만(Marian Cove)’의 빙벽 일부가 무너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에는 마리안 소만 빙하가 무너져 발생한 유빙(流氷, 얼음덩어리)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밀려든 유빙은 하계 남극의 따뜻한 날씨에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바닷물에 녹았다. 이를 본 유진선 연구원도 바빠졌다. 빙하의 융해가 남극 미생물 생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진선 연구원과 조디악 보트를 타고 마리안 소만 빙벽 앞으로 이동했다. 빙하 융빙수 샘플을 채취하기 위함이다. 빙하 붕괴 위험 때문에 약 300미터 거리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하지만 거대한 빙하의 위엄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지속적으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도 들렸다. 마치 ‘남극의 심장’ 고동이 울리는 듯했다.

마리안 소만 앞 바닷물 샘플 채취를 완료한 후, 인근 해안가로 이동했다. 해안가 토양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다. 마리안 소만 인근의 세종봉·백두봉 등 산지엔 만년설처럼 많은 양의 눈이 쌓여있는데, 여름이 되면 녹아 흘러 해안가를 타고 바다로 담수가 유입된다. 이렇게 되면 마리안 소만 해안 토양에 서식하는 미생물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진선 연구원은 “기후변화로 인한 물순환 가속화는 남극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짧은 하계 기간 동안 다량의 빙하가 녹아 융빙수로 변하면서 토양 퇴적층의 염도나 산성도와 같은 화학적 특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메탄산화팀은 융빙수의 영향을 받는 남극 토양에서의 질산화 및 메탄산화 미생물 군집 분석과 배양을 연구 주제로 세종기지를 방문했다”며 “이번 남극 활동에서는 토양 퇴적층을 샘플링하고 DNA 추출 및 환경 시료 배양을 수행했다”고 덧붙였다.

◇ 남극의 ‘질소순환’에 우리 미래가 달렸다
마리안 소만 빙벽 근처 앞바다에서 채취한 샘플은 기지 내 공동연구실에서 간단한 분석을 거친다. 이후 냉동 및 검역 과정을 거쳐 국내로 반입된다. 이미 연구실 내 실험용 냉장고에는 유진선 연구원이 채집한 해수·토양 시료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진선 연구원이 이 샘플로 연구하는 핵심 미생물종은 ‘질산화미생물(nitrifying microorganisms)’이다. 남극과 같은 극지의 질산화미생물은 질소와 탄소를 매개로 다양한 대사 과정을 한다. 이를 통해 해수와 토양의 물질 순환이 발생하며 생태계 에너지 흐름이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미생물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자연 생태계의 물질 순환도 붕괴된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빙하 후퇴’ 문제가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빙하가 녹아 많은 담수가 바닷물이나 토양으로 유입되면 생물의 활성화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유진선 연구원은 “오랫동안 축적된 남극의 빙하에는 엄청난 양의 영양소, 산소, 질소 등이 존재한다”며 “이것들이 다량으로 녹아 바다나 습지에 유입될 경우 미생물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까지 정확한 연구가 진행된 바는 없으나 남극 미생물 생태계가 변화되면 지금과는 다른 생물·지질학적 사이클이 발생할 것”이라며 “이는 미생물뿐만 아니라 남극 전체의 자연 생태계와 종 다양성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남극 미생물군 생태계에 불균형이 초래될 경우, ‘기후변화’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일부 미생물종의 경우에는 이산화탄소(CO₂) 등 온실가스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반대로 니트로소모나스(Nitrosomonas)와 같은 암모니아 산화세균류는 아산화질소(N₂O)를 배출한다. 아산화질소는 이산화탄소보다 약 300배 강한 온실가스다. 질소순환은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이 사이클이 무너지면 기후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국제 미생물 공동 연구진도 2019년 ‘네이처(Nature)’에 ‘과학자들이 인류에게 경고하는 미생물과 기후변화’를 제목으로 공동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성명서에서 과학자들은 “우리는 미생물이 기후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인간 활동이 미생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아야 한다”며 “기후변화의 영향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미생물의 반응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진선 연구원은 “질소와 탄소순환은 생태계 내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유지한다”며 “인간 활동과 환경 변화가 이들 순환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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