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가 제1차 산업통상자원특허소위원회를 열고 ‘에너지 3법’을 여야 합의로 의결했다.
에너지 3법은 △장거리 송전망 신설 및 송·변전시설 설치에 따른 지원 체계 등을 명시한 ‘국가기간전력망확충법’ △사용 후 핵연료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저장시설 지정 절차 등을 규정한 ‘고준위방폐장특별법’ △정부 주도 계획 입지 방식으로 해상 풍력 사업을 추진하고 인허가 절차를 통합·간소화한 ‘해상풍력특별법’으로 하나같이 입법에 있어 촌각을 다퉈왔다.
여야가 쟁점 사항에 대한 합의를 도출, 법안을 처리한 만큼 입법 과정도 무난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준위 방폐장 선정, 송·변전 인프라 확충, 해상풍력 보급 확대라는 국가적 에너지 현안 해결을 위한 정부 움직임에도 속도가 날 전망이다.
◇고준위 방폐물 처리 난맥 해소 ‘파란불’
에너지 3법 가운데 처리가 가장 시급한 법률안으로 고준위 특별법이 지목돼 왔다. 사용 후 핵연료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저장,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의 설립 근거, 절차 등을 규정한 법안이다.
방사성 폐기물은 방사능 농도와 열 발생률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지정한다.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방폐물은 2015년부터 운영에 들어간 경주 방폐장으로 이송·관리하고 있지만 고준위 방폐물은 별도 최종 처분장이 없어 원전 내 수조(습식)에 저장하고 있다. 고준위 방폐장은 물론이고 중간 저장 시설, 원전 부지 내 저장시설(건식) 건설이 적절하게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80년대부터 9차례에 걸쳐 고준위 방폐장 부지확보에 나섰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안면도(1990년), 굴업도(1994년), 부안(2003년)을 후보지역으로 선정했지만 법적 절차·근거가 없었던 탓에 모두 무산된 바 있다.
이로 인해 1978년 고리원전 1호기 상업 운전이 시작된 이래 국내 원전에 쌓인 고준위 방폐물은 2만톤에 육박한다. 2030년 한빛 원전을 시작으로 원전 내 습식 저장고는 포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전 운영 지역 주민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고준위 방폐장이 선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원전 내 사용 후 핵연료가 쌓이면 원전이 사실상 고준위 방폐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별법은 이런 난맥을 해소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법안이다. 시행되면 부지 선정 절차도 시작하지 못한 고준위 방폐장 입지를 선정,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반이 마련된다.
정부는 특별법을 통해 원전 부지 내 저장 시설-중간 저장 시설-최종 처분장으로 이어지는 고준위 폐기물 관리 체계를 확립할 계획이다. 부지 내 저장시설 건설에 속도를 내고 이어 2050년까지 중간 저장시설, 2060년까지는 최종 처분 시설을 건설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과의 갈등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별법에 갈등 중재 역할을 할 조직 구성과 유치지역에 대한 보상 규정을 구체했기 때문이다.
고준위 방폐물 관리에 필요한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국무총리실 직속 고준위 방폐장 관리위원회 구성 근거를 담았고 주민투표를 포함한 부지선정절차를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방폐장 유치를 신청한 지자체는 대상 부지의 기본, 심층조사를 실행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부지를 확정할 때는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유치지역 지원을 위한 특별지원금 등 범정부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다. 원전 부지 내 저장시설 건설 계획 수립시 주변지역 의견수렴을 의무화하고 주변지역 지원을 위한 지원방안과 지원사업종류 등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윤종일 KAIST 원자력·양자공학과 교수는 “수십년간 공회전한 고준위 방폐장을 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주민 의사로 최종 입지를 결정하는 구조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입법 걸림돌 ‘쟁점’ 제거했지만 숙제 남아
고준위 특별법 제정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2010년대다. 박근혜(2015년)·문재인(2021년) 정부에서 두 차례 실시한 공론화에 참여한 6만1000명의 전문가, 지역 주민, 일반 국민은 고준위 방폐물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20대 국회에서 고준위 방폐물관리 특별법, 중간저장시설 부지선정법이, 21대 국회에서 고준위 특별법안 3건과 방사성폐기물관리법 전부개정안 등 총 4건의 법안이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됐다.
이번 처리 과정에서도 여야 합의가 순탄치 않았다. 21대 이어 여야가 부지 내 저장 시설의 용량 규정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여당·정부는 용량을 ‘원자로 운영 허가 기간의 발생 예측량’으로, 야당은 ‘설계 수명중 발생 예측량’으로 규정할 것을 각각 주장했다. 여당은 원전의 계속 운전을 고려했고 야당은 원전을 설계 수명대로만 운영해야 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용량을 규정했다.
정부가 한 발 물러나면서 야당안이 최종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부지 내 저장시설의 저장용량은 ‘원전 내 건설 또는 운영 중인 발전용원자로의 설계수명 기간 동안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는 (사용후 핵 연료의)양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이와 함께 부지 내 저장시설에 다른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도 반입할 수 없도록 했다. 고준위 특별법의 최대 쟁점을 제거한 것으로 향후 입법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원이 민주당 의원(산자위 간사)은 “부지 내 저장시설 관련 용량 규정을 정부가 삭제하기로 하면서 큰 산을 넘었다”면서 “원전 지역 주민의 우려를 완전히 해소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원전이 계속 운전 허가를 받을 경우 추가로 발생하는 사용 후 핵연료 처리는 과제로 남았다.
윤 교수는 “계속 운전으로 원전 수명이 설계 수명 대비 길어질 경우 발생하는 사용 후 핵연료는 어떻게 처리할 지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면서 “이와 함께 행정적으로 본부를 분리한 일부 원전에서 부지 내 저장시설을 중복으로 건설해야 하는 등의 상황도 벌어질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호 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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