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의 내적 성장 발판은 외적 흡수가 초석이 됐다. 과거 거친 중앙집권의 행정편의로 계양과 검단 등이 인천에 안겼지만, 처음에는 반발이 거셌다. 지역 간 이질감은 차별 논란까지 더해지며 예전으로 회귀하고자 움직임이 상당했다. 선거 때마다 단골처럼 이어지더니, 최근 총선에서는 서울로 모이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제기됐다.
인천은 직할시에 이어 광역시로 거듭나며 인근 지역을 인천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내고, 30년을 보전한 끝에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이란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
그 대표적인 곳이 ‘검단’이다. 검단의 인천화를 시작으로 성장에 이은 단일 기초자치단체로의 독립 과정을 통해 31년 만에 개조되는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과 앞으로의 인천 기초자치단체 구조조정을 엿볼 수 있다.

▲인천, 30년 성장통의 연속
2012년 인천발전연구원(현 인천연구원)에서 ‘지방행정체제 기본계획의 쟁점과 인천시 대응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당시에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10년 만에 이 보고서가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의 기틀이 됐다.
채은경 행정학 박사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31년 만에 바뀌는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을 내다봤다.
채 박사는 강화군, 서구 및 계양구 일부 지역(경인아라뱃길 북부)을 통합하는 안을 놓고 “단기간 내에 이 대안이 채택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나 향후에는 책임행정 구현의 차원에서 경계 조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조사해 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중구와 동구를 통합한 과소 자치구 통합 논의에는 “통합 기준의 관점에서 동구는 대상이 되지만 중구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강화군과 옹진군 등 군(郡)에서 구(區)로의 전환에는 “농어촌 지역 특성과 접경지역 특색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 자치구 전환 반대 입장 견지”를 나타냈고, 8개 자치구의 준자치단체로 변환에도 “정치적으로는 단기적으로 현실화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장기적 제도 변화 모색”이란 의견을 던졌다.
채 박사의 보고서 중 서구에서 경인아라뱃길 북부 지역인 검단이 자치단체가 됐다. 또 중구에서 영종지역을 뗀 나머지 내륙과 동구가 하나돼 제물포구로 탈바꿈하게 됐다.
1994년 인천은 경기도 일부였던 강화군과 옹진군을 비롯한 김포군 검단면의 인천 편입을 놓고 중앙정부와 인천-경기간 진통을 거듭했다. 당시 제도화되지 못했지만 임시로나마 이뤄진 주민투표 등을 통해 강화군과 옹진군이 인천이 됐고, 김포 전체의 인천 편입은 불가능했지만 검단이 인천으로 자리하게 됐다.
여기에 경기 김포군 계양면의 인천 편입은 드라마틱했다. 김포 계양이냐 부천 계양이냐는 한동안 사분오열됐지만, 결국 인천시 계양구로 자리 잡게 됐다.
이는 인천과 경기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자, 학습권·경제권 등 기존 행정 구역 중심이 아닌 생활권을 바탕으로 한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이뤄질 경우 언제든 인천과 김포, 부천을 비롯한 시흥 등과 행정체제가 개편될 수 있음을 보인다.
여기에 전국 균형발전과 개헌 논의 등이 급물살을 이루면 미래지향적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언제든 고개를 들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인천 지역번호권역(032)은 유효하다. 지금이야 휴대전화 보급 등으로 의미가 퇴색됐지만, 여전히 인천 전역(옹진군 덕적면 백야리 목적도 제외)은 물론 부천(역곡·옥길동 제외), 안산시 대부동과 서울 강서구 오쇠동 일부가 지역번호 032를 사용한다. 그만큼 인천 생활권역임은 변함없는 것이다.
인천형 행정체제 개편 과정에서 허약한 기초자치단체의 독립 수준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추모 공원과 쓰레기 소각장, 시설관리공단 등 다양한 문화·복지시설 중복 문제는 물론 출산장려금 등 자치구·군 간 재정 격차로 인한 주민서비스 불균형, 가용재원 부족으로 자치단체의 존립 기반 취약 등이다.
▲검단, 인천형 행정체제 상징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 선생은 추사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인천의 예술혼을 상징하는 분이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5월22일 출생으로, 출생지는 경기도 부평군 서궂면 시천리 57번지였다.
시천리 57, 경인아라뱃길 조성을 맞아 검여 생가 주변은 매화마을로 조성됐다.
시천동은 경인아라뱃길로 양분된다. 시천리 57번지는 경인아라뱃길 북측에, 매화마을은 경인아라뱃길 남측에 있다. 인천 서구 시천동은 2026년 7월1일 서구와 검단구로 나뉜다.
지역을 중심으로 자생한 시민사회단체 중 김포검단시민연대(김검시대)가 있다. 가장 핫한 서울도시철도 5호선 연장을 놓고 빚어진 여러 행정편의주의를 지역 주민이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명칭에서 보여주듯 김포와 검단은 가깝고도 가깝다.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은 1994년 주민 표결 끝에 1995년 3월1일부터 인천이 됐다. 당시 김포군 전체를 인천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경기도의 반발이 컸고, 결국 검단면만 인천에 왔다. 1995년 1월1일 인천직할시에서 인천광역시 출범의 기틀이 검단이었고 옹진(대부도 제외)과 강화였다.
현 인천의 2군·8구 체제 중 옹진과 강화는 기초자치단체이다. 1989년 김포군 계양면에서 인천으로 온 계양면도 어엿한 기초단체가 됐다.
검단은 인천 편입 31년 만에 독립된 지위를 갖게 됐다. 2007년 검단신도시가 발표됐고, 검단2신도시를 포기하는 수난을 겪었지만 인천시 서구 인구의 폭발적 증가 원인을 검단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검단이 완전한 인천이 되기까지는 여러 갈등을 겪었다.
2010년대 초반 검단은 발전에서 소외됐고 인천의 행정정체에서 후순위에 밀린다며 김포로의 회귀를 바라는 목소리가 컸다. 주민 갈등을 파고들며 김포에서 다시 검단을 복속시키겠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심지어 선거 때마다 검단지역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2002년 검단지역 선거구가 강화 지역으로 편입된 데 반발한 검단사회단체협의회 등은 ‘검단선거구 획정안 헌법소원 심판청구’ 등을 제출하며 “검단동과 20㎞나 떨어진 강화선거구에 편입한 것은 지역 주민들의 의사와 정서를 무시한 정치적 논리”라고 비판했다.
최근 총선에서 득세한 서울 편입론에 김포가 가세하며 인천 북부 지역에서는 서울과 근접한 김포권역임을 내세운 정치 논리에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그래도 검단은 30년의 파고를 잘 헤치며 단일 기초자치단체가 됐고, 행정구역 조정 등의 갈등은 빚고 있지만 인천 편입에 앞장선 주민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주영·전민영·정혜리 기자 leejy96@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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