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에 있는 방산시장은 해마다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MZ세대 사이에서 ‘수제 초콜릿 성지’로 꼽히며 인기가 높았다. 수제 초콜릿 재료, 다양한 초콜릿 모양을 만드는 몰드(mold·틀), 포장재를 저렴한 가격에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초콜릿 원재료 값이 뛴 게 원인이라고 한다. 원재료 주산지인 서아프리카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면서 1만3000㎞ 떨어진 방산시장에도 영향을 준 셈이다.
14일 찾은 방산시장은 한산한 편이었다. 20년 넘게 수제 초콜릿 재료를 판매 중인 50대 유모씨는 “올해는 특히 힘들다”며 “밸런타인데이 시즌에 매출이 나와 줘야 1년 장사가 유지되는데, 예전처럼 손님이 오지 않아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다른 상인 김기영(64)씨도 “작년 발렌타인데이 때는 어느 정도 손님이 있었다”면서 “지금은 초콜릿 가격이 올라서 그런지 손님이 ‘아예 없다’고 느낄 정도”라고 말했다.
‘대목’인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손님 발길이 끊긴 것은 수제 초콜릿을 만드는 주 원료 가격이 크게 뛰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씨는 “지금은 커버춰(couverture) 초콜릿이 500g에 1만7000원인데 1년 만에 2배로 값이 올랐다”며 “수제 초콜릿을 2번 만들 수 있던 돈으로 1번밖에 못 만드니 손님 만족도가 뚝 떨어졌다”고 했다. 커버춰 초콜릿은 카카오 버터 함량이 30% 이상인 고급 초콜릿으로, 따뜻한 물에 중탕해 녹이는 템퍼링(tempering) 작업을 한 뒤 몰드에 부어 수제 초콜릿을 만든다.

유튜브에서 조회수 58만회를 기록한 밸런타인데이 수제 초콜릿 제작 영상대로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아봤더니 가격이 총 8만7000원이었다. 1년 전이었다면 6만3000원이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가격 변동이 거의 없는 설탕·버터나 포장재를 제외한 초콜릿 주원료 때문에 전체 비용이 올랐다.
머그컵 2개 분량의 아망드 쇼콜라 재료를 사는데 5만4000원이, 손바닥 크기 종이 상자 2개를 채울 정도의 망디앙 초콜릿 재료를 사는 데에는 3만3000원이 각각 들어갔다. 1년 전에는 각각 4만원, 2만3000원이면 구매할 수 있었다. 아망드 쇼콜라는 볶은 아몬드에 설탕을 입힌 뒤 여러 차례 초콜릿을 덧발라 만들고, 망디앙은 초콜릿 원판 위에 견과류나 말린 과일을 얹어내 만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서아프리카 이상 기후의 ‘나비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는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에서 전 세계 생산량의 60%가 나온다. 이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닥쳐 수확량이 대폭 줄었다. 국제코코아기구(ICCO)에 따르면 코트디부아르에서 2023년 9월~작년 9월까지 카카오를 가공한 코코아 생산량은 1년 전보다 22% 줄었다. 가나는 27% 감소했다.
이에 따라 코코아 선물 가격은 수십년 간 1t당 2000달러대를 유지하다 작년에 5~6배 넘게 뒤며 1만 달러를 넘었다. 작년 1년간 코코아 가격 상승률은 172%로, 주요 원자재 중 가장 많이 올랐다. 국제 가격 인상은 곧 국내 소매 가격에 반영된다. 다음 달에 초콜릿·코코아 가격이 또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수제 초콜릿 재료를 사려고 방산시장을 찾아온 연인들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최모(27)씨는 “수제 초콜릿을 친구들과 함께 만들고 남자 친구에게 주려고 했는데, 사다 보니 예산으로 잡은 10만원을 넘겼다”며 “지인들에게도 초콜릿을 나눠주려 했는데 재료가 부족하다”고 했다. 서울 신촌에서 자취하는 김모(23)씨는 “재룟값을 생각하면 수제 초콜릿을 만들 엄두가 안 난다”며 “그 돈으로 남자 친구와 외식하는 게 낫겠다 싶어 초콜릿 선물은 접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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