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런던으로 떠나봅니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템스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시계탑 ‘빅벤’과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황금빛 첨탑과 화려한 고딕 건축은 영국의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며,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이 건물 위에는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이 휘날립니다. 단, 하원이 개회 중에는 ‘세인트 에드워드 깃발’이 게양되는 영국의 오랜 전통을 보여줍니다.
템스강 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대 왕들의 숨결이 깃든 성스러운 공간으로, 1066년 윌리엄 1세 이후 영국의 모든 국왕이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왕들에게 ‘세인트 에드워드 왕관’이 씌워지는 순간, 영국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왕실의 결혼식도 이곳에서 열렸고, 위인들도 이곳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찰스 디킨스가 묻힌 이곳에는 ‘시인의 코너(Poets’ Corner)’가 자리하고 있으며, 셰익스피어, 바이런, 키츠, 셸리 같은 문학 거장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영국 역사와 문화를 품어온 중심지였습니다.
런던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가장 빠르게 떠날 수 있는 곳은 ‘대영박물관’입니다. 공룡 이전 시대의 화석에서 시작해, 이집트 미라가 잠든 전시관을 지나면, 고대 문명의 비밀을 풀어낸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 묵묵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은 이 돌 앞에서 숨을 죽이며 과거를 상상하게 됩니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엘긴 대리석(Elgin Marbles)’은 ‘문화재 반환 문제’로 논란이 많지만, 그 조각상의 아름다움은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과거로의 문이 열린 듯한 또 다른 장소가, 바로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입니다. 원형의 개방형 구조, 목재로 된 객석, 열린 천장이 400년 전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햄릿의 고뇌, 리어왕의 비극, 베로나의 연인들이 속삭이는 사랑의 언어가 관객들의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곳이지요. 400년 전 런던의 연극 문화가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런던은 낡고 보수적인 이미지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이 도시는 세계 최초의 철도와 지하철(1863)을 탄생시켰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대적 면모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타워 브리지’를 건너면, 유리로 뒤덮인 초현대적 건축물 ‘더 샤드(The Shard)’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으며, 밀레니엄 기념으로 세워진 ‘런던 아이(London Eye)’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런던의 진면모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매일 버킹엄 궁전 앞에서 펼쳐지는 ‘근위병 교대식’은 왕실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듯하지만, 런던의 밤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웨스트엔드(West End)’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레 미제라블’과 ‘오페라의 유령’이 막을 올리고, 극장가의 펍(Pub)에서는 늦은 밤까지 사람들의 웃음과 대화가 넘쳐난다. 셰익스피어도 즐겨 찾았다는 영국의 대중적인 술집인 펍은, 수백 년의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입니다. 300년 된 목조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이 놓여 있고, 석조 벽난로 앞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합니다. 전통과 현대가 단절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이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런던의 펍입니다.
런던은 또한 젊음과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카나비 스트리트(Carnaby Street)에서 히피들이 모여 사랑과 평화를 외쳤고, 1970년대에는 펑크 록의 성지로 변모해 강렬한 음악과 개성을 표출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회에 대한 반항과 자유로운 정신이 넘쳐났던 그 시절의 분위기는 지금도 런던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혁신, 그리고 세계 각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런던. 이곳에서의 하루는 마치 한 편의 멋진 연극처럼 감동적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런던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고 있으며, 그 속에서 전통과 현대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나애리 전 수원대학교 유럽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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