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자연선택은 미미한 연속적 변화에 의해 발생한다.
크고 갑작스러운 도약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짧고 확실하지만 느린 걸음으로 전진한다.
-찰스 다윈 《종의 기원》(1859)-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모든 생물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멸종위기종 동물부터 우리가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 개, 비둘기들의 행동 모두 마찬가지다. 각자 저마다의 본능, 삶의 목적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 변화를 기록·연구하는 것은 곧 자연 생태계 변화 관측 연구의 초석이 된다.
서울대학교 동물모니터링팀이 ‘남극(Antartica)’을 찾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남극에는 다양한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다. 특히 펭귄을 비롯한 여러 조류(Bird)들은 이 척박한 생태계를 지탱한다. 거친 환경을 헤치며 남극의 새들 행동, 습성 하나하나를 기록한 동물모니터링팀의 남현영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박사), 고종빈 서울대 농림생물자원학부 연구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펭귄을 연구하면 ‘기후위기’가 보인다
2024년 12월 25일,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는 크리스마스로 들뜬 분위기였다. 그러나 남현영 박사와 고종빈 연구원은 두꺼운 방한복, 하얀색 방역복으로 중무장한 채 세종기지를 나섰다. 동물의 생태를 놓치지 않고 연구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조차 반납한 것이다.
이들이 향한 곳은 ‘남극특별보호구역(ASPA) No. 171 나레브스키 포인트’, 일명 ‘펭귄마을’이었다. 세종과학기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이곳은 ‘젠투펭귄(Gentoo penguin)’ ‘턱끈펭귄(Chinstrap penguin)’이 각각 4,000쌍, 2,500쌍이 서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극바다제비’, ‘칼집부리물떼새’, ‘자이언트 패트럴’ 등 남극의 주요 조류종들이 다수 번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대 동물모니터링팀의 주요 연구종은 ‘펭귄’이다. 연구팀과 함께 도착한 펭귄마을에서는 여기저기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턱끈펭귄들의 새끼가 태어난 것이다. 알에서 부화한 지 몇 시간이 안 된 펭귄들은 하얀 솜털로 덮여있었다. 병아리처럼 “삐약” 소리를 내는 모습은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턱끈펭귄의 이웃, 젠투펭귄들의 새끼들은 2~3일 먼저 태어나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연구팀은 ‘크리스마스 펭귄’이 꼭 좋은 의미는 아닐 수 있다고 우려했다. 펭귄의 부화시기가 평소보다 앞당겨졌기 때문이다. 남현영 박사는 “몇 년전만 해도 젠투펭귄은 12월 말쯤 부화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보다 이른 12월 중순쯤 이미 새끼들이 태어났다”고 전했다. 또 “1월 초 부화했던 턱끈펭귄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알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는 남극의 여름시기가 예전보다 앞당겨졌다는 의미다.
실제로 최근 펭귄 생태변화는 남극 ‘기후변화’ 연구의 핵심 데이터로 사용되고 있다. 2019년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학교 연구진은 젠투펭귄의 먹이 변화를 분석해 아남극 전선(SAF)의 변화를 예측하기도 했다. 아남극(亞南極, subantarctic)은 남반구 지역으로 남극 지역 바로 북쪽에 위치한다. 여기서 아남극 전선은 남극 지역과 아남극 지역을 나누는 바다의 경계선인데, 최근 기후변화로 이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고종빈 연구원은 “과거 연구팀은 펭귄이 부화하기 전 12월 말에 남극에 도착, 2월 중순 정도까지 연구를 진행했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점점 부화하는 시기가 빨라져 12월 초부터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현영 박사는 “보통 동물의 생태 변동은 장기적 시간인 50~1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남극은 기후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돼 10년 사이에도 큰 변화 추세가 등장했다”며 “눈이 녹으면 알을 낳는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의 경우 기후변화에 특히 큰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 칼집부리물떼새 연구 통해 ‘남극 질병’도 추적
서울대 동물모니터링팀은 펭귄뿐만 아니라 남극특별보호구역 내 서식하는 모든 조류와 포유동물을 모니터링한다. 그중 주로 ‘칼집부리물떼새’를 연구한다. 이들의 번식 성공률, 번식 시기 및 장소 변화, 비번식기 월동지 이동 행동 등을 파악하면 남극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칼집부리물떼새의 둥지는 남극 환경 변화를 유추하는데 중요한 지표로 사용된다. 칼집부리물떼새는 주변의 다양한 물건을 주워다 집을 만든다. 이때 둥지를 화려하게 만들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습성이 있다. 펭귄의 뼈, 스쿠아의 깃털, 해표의 이빨, 심지어는 바다에서 떠내려온 플라스틱 쓰레기 등을 둥지 재료로 사용한다. 칼집부리물떼새의 둥지는 일종의 ‘작은 남극’인 셈이다.
고종빈 연구원은 “모든 동물들은 생존 경쟁을 하는데 이때 몸을 부딪혀 싸울 경우 이기는 쪽이든 지는 쪽이든 부상으로 손해가 발생한다”며 “하지만 칼집부리물떼새는 직접 싸우지 않는다. 마치 인간이 보석이나 비싼 차로 재력을 과시하듯, 화려한 둥지 장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고 설명했다.
남극 생태계 질병 관측에 있어서도 칼집부리물떼새 연구는 중요하다. 서울대 동물모니터링팀은 칼집부리물떼새의 깃털, 혈액, 배설물 표본 등을 활용해 남극 조류들의 질병 감염 및 전파 메커니즘을 분석한다. 이는 칼집부리물떼새의 먹이 활동 습성 때문이다.
펭귄마을에 서식하는 새들 중 칼집부리물떼새는 유일하게 물에 들어가지 못하는 새다. 즉, 해안가로 밀려온 크릴새우나 조개를 제외하면 직접 바다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다. 이에 펭귄이나 갈색도둑갈매기 등 다른 새들의 배설물을 먹고 영양분을 보충한다. 때문에 다른 조류들에게 질병이 발생하면 배설물을 통해 칼집부리물떼새도 감염될 확률이 높다.
남현영 박사는 “칼집부리물떼새는 펭귄이나 다른 번식지 근처를 돌아다니며 알, 죽은 새끼의 사체, 다른 똥에서 소화되지 않은 단백질을 먹고 산다”며 “이런 배설물들을 섭취하기 때문에 다른 종들의 질병을 수집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동물모니터링팀은 지난해 10월부터 남극의 ‘진드기’ 연구도 새롭게 시작했다. 펭귄마을 바위 아래나 흙속에 서식하는 남극 진드기들은 펭귄, 스쿠아, 해표 등 새나 포유동물의 피를 빨아먹는다. 연구팀은 이들의 표본을 수집한 후, 그 안에서 동물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한다. 이를 통해 남극 온혈동물들의 질병 전파 현황과 종류 등을 분석한다.
남현영 박사는 “아직은 조류 인플루엔자를 포함해 남극 질병과 관련해선 거의 연구된 게 없다. 특히 진드기 연구는 아주 초창기”라며 “지난 10월부터 처음 연구를 시작했고, 수집한 진드기 샘플은 한국으로 가져간 다음, 진드기 몸속에서 발견된 동물들의 혈액 성분을 분석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 남극 조류 연구, 생태계 이해 필수 요소
펭귄 등 남극 조류들의 생태·행동 연구는 남극 생태계를 이해하는데 필수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다. 펭귄과 스쿠아, 칼집부리물떼새, 남극바다제비 등 남극 조류들은 모두 ‘이동’이 활발한 생물이기 때문이다. 펭귄들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루 평균 25km를 움직인다. 또한 스쿠아나 칼집부리물떼새는 장거리 비행을 하기 때문에 이동 경로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연구팀은 ‘바이오로깅(Bio-logging)’을 연구에 적극 활용한다. 바이오로깅은 칩을 동물에 장착, GPS로 추적하는 방식이다. 서울대 동물모니터링팀은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의 피부 아래 매우 작은 개체 인식칩을 삽입했다.
바이오로깅으로 얻은 데이터는 다양한 연구에 사용된다. 펭귄의 경우 사냥에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펭귄 개체수, 생존율을 연구한다. 또한 펭귄 부부간 ‘이혼 확률’ 연구도 가능하다. 펭귄은 수컷 개체가 하나의 암컷과 오래 살아가는 금실 좋은 동물이다. 하지만 때때로 배우자의 사망, 변심 등으로 새로운 짝을 찾기도 한다.
칼집부리물떼새는 다리에 무선추적기를 부착한다. 그 다음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안테나를 통해 실시간 이동 데이터를 기록한다. 이렇게 얻은 데이터는 △칼집부리물떼새의 펭귄 집단번식지 내 세력권 형성 및 이용 양상 △비번식기 서식지 이용 및 이동경로 파악 등의 연구에 사용된다.
혈액 샘플 채취도 동물 생태 모니터링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질병뿐만 아니라 혈액 내 유전자 샘플을 이용하면 펭귄의 성별에 따른 먹이원, 행동 차이 등을 분석할 수 있다.
남현영 박사는 “남극에서 수집한 샘플은 한국에 4월께 도착할 예정으로, 연구실에서 정밀 분석을 시작하면 2026년쯤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이를 통해 남극 생물들의 생태와 질병 전파 메커니즘, 현황 등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 박설민 기자, 김두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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