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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에서 ‘자경단’이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꾸려 5년간 남녀 234명을 성 착취한 김녹완(33)의 신상이 공개됐다. 경찰은 범죄의 잔인성 등을 고려해 신상 공개를 결정했는데, 김 씨의 집행정지 신청으로 공개가 무산될 뻔 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박사방’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텔레그램 성 착취 범죄집단을 운영한 만큼 김 씨의 신상 공개를 두고 파장이 확산되는 한편, 신상공개 제도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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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서울경찰청은 전날 9시부터 홈페이지를 통해 김 씨의 이름과 나이, 사진을 공개했다. 김 씨의 정보는 다음달 10일까지 한 달 간 공개될 예정이다.
김 씨는 2020년 5월부터 이달까지 5년 가까이 ‘자경단’에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234명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강간, 강제추행, 유사강간 등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총 1546개의 성 착취물을 제작한 혐의를 받는다. 김 씨를 포함해 같은 방에서 범죄에 가담한 조직원 14명도 전원 검거됐고, 자경단에 지인의 딥페이크 영상 등을 제공한 피의자 73명도 특정(40명 검거)했다.
이번 사건은 조주빈(29)이 피해자 수가 73명이던 ‘박사방’을 운영한 것과 비교하면 피해 규모가 3배가 넘는다는 점에서 충격을 자아내고 있다. 피해자 중 67.9%에 달하는 159명은 미성년자인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남성에게는 ‘지인능욕방에 초대시켜주겠다’고 했고, 여성에게는 ‘당신의 성적 사진이 텔레그램에 유포될 것 같다’며 텔레그램으로 유인한 뒤 휴대폰 번호 등 신상정보를 확보하고 협박했다. 다단계 형태로 조직을 운영하며 범행에 동조하는 사람은 ‘목사→집사→전도사→예비전도사’ 순으로 계급을 부여하기도 했다.
김 씨는 피해자들에게 1시간 단위로 일상을 보고하게 하는 등 통제하면서 가학적 성착취 행위를 강요했다. 미성년 여성 피해자 10명에게는 성관계를 해야 지배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강간(치상)하고 당시 모습을 촬영했다. 조직원이 지시를 이행하지 않거나 이탈하겠다고 하면 ‘범죄행각을 텔레그램에 박제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다른 조직원을 통해 유사강간·구타 등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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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은 지난달 22일 신상정보 공개심의위원회를 열어 범행 수단의 잔인성, 피해의 중대성 등을 고려해 김 씨의 이름과 나이, 얼굴 등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 씨가 이의 신청하면서 경찰은 중대범죄신상공개법에 따라 5일 이상 유예기간을 둔 뒤 신상정보를 공개하기로 했는데, 그 사이 김 씨가 서울행정법원에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본안소송인 ‘신상정보 공개 처분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원의 판단에 관심이 쏠렸다. 다만 서울행정법원이 신상공개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하면서 경찰의 신상공개도 진행됐다.
김 씨의 경우처럼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는 사례가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함께 근무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뒤 북한강에 유기한 군 장교 양광준(38)도 경찰이 신상공개를 결정한 다음날 법원에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신상정보 공개 처분 취소 청구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양 씨의 집행정지 신청을 기각했고, 양 씨의 신상정보 공개가 이뤄졌다.
실제 법원이 신상정보 공개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하는 사례도 있다. 2020년 7월에는 경찰이 텔레그램 ‘n번방’에서 성 착취물을 구매한 혐의를 받는 A 씨의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했지만 법원은 “신상 공개는 재판으로 범죄가 확정되기 전에 범죄자라고 공개적으로 인정되는 효과가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A 씨가 제기한 신상정보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A 씨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처럼 신상 공개에 대해 법적 다툼까지 진행되면서 제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중대범죄신상공개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돼 지속적으로 활용될 전망이지만, 이 과정에서 ‘5일 유예’의 빈틈을 파고들어 행정소송이 진행되는 사례가 이어지는 등 혼란을 낳았기 때문이다. 흉악범에 대한 신상공개가 이뤄지지 않을 시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된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신상정보 공개 자체가 무죄추정의 원칙에 위배되고 피의자의 가족에 대한 사적 처벌과 사회적 낙인을 찍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검찰청이 지난해 발간한 학술지에는 이관희 고려대학교 정보보호연구원 교수 등이 저술한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 개정안 제시에 관한 연구’가 실려 기본권과 법익의 균형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논문은 “신상정보 공개 결정은 무죄추정의 원칙 등을 제한하는 국가권력의 침익적 작용이기에 헌법의 영장주의 제도에 근거해 법관(재판부)이 판단하는 것이 침해최소성과 법익균형성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신상공개 제도에 대해 영장주의 도입을 제안했다. 비공개 회의기구인 경찰청 신상정보 공개심의위가 자의적 판단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고려해, 법관 앞에서 신상정보 공개에 대해 의견을 진술하는 등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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