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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의 굶주린 유대인들, 어미는 죽은 아들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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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의 경우 모자를 쓰고 가죽 부츠를 신고 유대인 동포들에게 곤봉을 휘두른 민병대원들은 주로 교육을 받은 중산층 남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젊은 변호사와 대학 졸업생들도 있었다. 게토(ghetto)의 많은 사람들이 볼 때, 민병대는 유대인을 수색하고, 규제하고, 감시하라는 게슈타포(비밀경찰)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최악의 인간’들로 이뤄졌다](주디 버탤리언, 「게토의 저항자들: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 투쟁기」, 책과 함께, 2023, 86쪽).

위의 글은 폴란드 유대인에 뿌리를 둔 미국인 작가 주디 버탤리언의 책(The Light of Days, 2020)에서 옮겨왔다. 버탤리언의 할머니는 나치의 집단학살을 피해 소련 쪽으로 도망쳐 살아남은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지난주에 살펴본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유대인 평의회(Judenrat) 장로들, 특히 민병대(유대인경찰)를 가리켜 나치에 빌붙어 동족을 배신한 ‘최악의 인간’으로 비판했다.

민병대는 유대인 평의회가 게토 치안을 위해 꾸린 경찰 조직이었으나, 실상은 나치의 폭력 도구로 쓰인 꼭두각시였다. 게토 주민들을 위협하는 존재는 치안대원들뿐 아니었다. 같은 게토 안에 살면서도 독일 비밀경찰(게슈타포)에 선을 대고 이웃을 고발하는 정보원들도 있었다. 밀고의 반대급부로 이들은 설탕이나 소금 자루를 챙겼고, 수용소로 떠나는 열차에 남들보다 먼저 실려 가지 않았다(물론 끝내는 그들도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친독(親獨) 유대인들이 했던 역할은 이렇듯 논란으로 남았다.

▲ 1941년-1942년 무렵 동유럽의 독일 점령지엔 1,000개쯤의 유대인 게토가 있었다.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 1941년-1942년 무렵 동유럽의 독일 점령지엔 1,000개쯤의 유대인 게토가 있었다. ⓒU.S. Holocaust Memorial Museum

“페스트 종양을 모두 태워 버리겠다”

1941년 말까지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의 유대인 대부분이 게토에 갇혔다. 동유럽의 크고 작은 게토를 모두 합치면 1,000개쯤 됐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르샤바 게토였다(최대 수용인원 47만 명). 1940년 10월에 만들어진 바르샤바 게토는 1943년 봄의 봉기로 철저히 파괴된 채 문을 닫았다. 두 번째로 컸던 우치 게토(20만 명)는 1944년 8월 유대인 게토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해체됐다.

나치는 게토를 항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유대인들을 한 군데로 몰아놓고 ‘처리’하기 위한 중간 단계로 봤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위해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임시 조처였다. 게토의 유대인들은 영양실조 또는 전염병으로 죽지 않으면, 화물열차로 수용소로 실려 가 죽을 운명이었다. 우치 게토의 나치 행정책임자 위벨호어는 게토 설치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게토는 임시조치다. 언제 어떻게 우치 게토의 유대인들이 없어질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우리는 결국 이 페스트 종양을 남김없이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313쪽).

장벽을 두른 게토의 경비는 나치 친위대(SS) 소속 치안경찰과 유대인경찰(유대인 평의회 소속)이 맡았다. 반나치 활동을 막기 위해 보안경찰도 게토 안팎을 어슬렁거렸다. 치안경찰은 게토 안팎의 범죄(식량 밀반입 등)를 단속했고, 보안경찰은 불순분자를 색출해 죽이거나 수용소로 보냈다.

괴링, 유대인 재산 약탈에 가담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전에 독일-체코-오스트리아에서 나치 관리들은 유대인을 동유럽으로 추방하기에 앞서 재산을 약탈했었다. 그런 다음 전쟁이 터지자, 게토로 몰아넣었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에선 달랐다. 유대인을 게토로 추방하면서 약탈이 벌어졌다.

[재산 강탈, 노동자 징발, 식량 제한의 세 단계 과정은 정교하게 추진된 행정작전이었다. 독일의 경우 나치가 약탈에서 얻은 경제적 이득은 노동력을 징발하고 배급을 제한함으로써 거둔 이득보다 훨씬 컸다. 유대인들이 수는 적은데 자산은 막대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는 정반대였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은 물론 아니었다](라울 힐베르크 335-336쪽).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동유럽 유대인 재산의 강탈에 뛰어들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괴링은 독일 공군의 최고위급 사령관이자 독일경제와 관련된 ‘4개년 계획청’의 우두머리였다. 괴링이 압류재산을 차지하려고 만든 기관이 ‘동유럽 수탁청’이다. 수탁청은 베를린의 4개년 계획청 내에 본부를 두고 단치히(제국주의 단치히-프로이센),포젠(바르테란트),치하누프(동프로이센),카토비체(슐레지엔),크라쿠프(총독령) 등에 지청을 설치했다.

변호사 출신의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는 그 나름대로 유대인재산 약탈 권한을 손에 쥐려 했다. 1940년 1월24일 ‘유대인재산 몰수법’을 공포했고, 같은 날 ‘유대인재산 등록법’을 시행했다. 법령은 유대인이 지닌 모든 재산을 신고하도록 했다. 값나가는 보석이나 예술품은 물론이고, 자잘한 요리도구까지 모조리 적어내도록 했다. 하한선이 없었다.

괴링의 수탁청 관리들은 심지어 게토 안으로 들어와서 집안을 뒤져 귀중품을 약탈해갔다. 그러나 나치는 곧 깨달았다. 게토가 어차피 한시적인 유대인 임시 숙소라면, 나중에 열차에 태워 수용소로 보낼 때 한꺼번에 압수해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란 사실 말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곳에 닿은 유대인들은 들고 온 가방을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됐다.

몰수된 유대인 재산을 노리고 독일은 물론 동유럽 곳곳에 살던 독일인들이 몰려들었다. 나치는 유대인 재산 강탈보다도 처분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일인 이주자들은 저마다 우선권을 내세우며 다투었다. 유대인 기업들은 이리저리 소유권이 넘어갔지만, 주택은 임차인들에게 세를 주었다. 괴링의 수탁청이 집세를 받았다.

▲ 게토 거리의 굶주린 유대인 아이들. ⓒKnobloch, Ludwig
▲ 게토 거리의 굶주린 유대인 아이들. ⓒKnobloch, Ludwig

재산 약탈 다음으로 노동력 착취

나치 독일은 게토의 운용비용마저 유대인에게 물렸다. 유대인 평의회는 게토 장벽을 세우는 데 든 건설비용을 독일 건설회사에 내야 했다. 게토 경비에 드는 비용도 유대인 평의회가 대도록 했다. 그 부담은 게토의 일반 유대인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첫겨울을 맞은 1941년 12월, 동부전선의 독일군에게 보내준답시고 게토 유대인들로부터 모피(털 코트, 목도리 등)를 빼앗기도 했다.

동유럽의 가난한 유대인 재산 약탈엔 한계가 있었다. 나치에게 실제로 중요한 경제적 의미는 노동력이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숙련 노동자들이 많았다. 곧 강제노동이 법제화됐다. 폴란드 침공 다음 달인 1939년 10월26일, 총독부는 ‘강제노동’을 일반 원칙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길거리에서 붙잡힌 유대인들은 ‘노동대’에 들어가 해질녘까지 일했다. 게토가 들어선 뒤엔 유대인 평의회가 나치가 요구하는 대로 노동 인력을 대주었다.

[게토가 운영하던 작업장에서의 노동력 착취는 게토 외부의 사기업보다 가혹했다. 예컨대 우치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 의장 룸콥스키는 원하는 유대인을 모두 무급으로 노동에 투입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녔다. 1942년 중반, 우치 게토의 유대인들은 2교대 노동을 강요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자식은 아버지를 볼 수 없고 아내는 남편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라울 힐베르크 351쪽).

여기에도 불평등이 도사렸다. 소수의 부자 유대인들은 평의회에 ‘노동면제세’를 내고 강제노동의 의무에서 풀려났다. 특히 바르샤바 게토에는 그런 부자들이 많았다. 최대 수용자 47만 가운데 1만 명쯤 되는 그들은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먹고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나치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게토가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게토의 실상은 번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한 빈민가로 바뀐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 게토는 1940년 10월과 11월의 6주 동안에 걸쳐 구도시 지역에 만들어졌다.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구름다리로 연결됐다. 유대인은 포로수용소에 갇힌 처지나 다름없었다. 게토 출입문이 15개 있었지만, 엄하게 통제됐다. 게토 바깥에서 일한다는 출입증을 지닌 이들은 드나들 때마다 무기나 식량 밀반입이 없는지 조사를 받았다.

넓이 3.4km²의 좁은 게토엔 공원이나 공터가 없었다. 벤치에 앉아 숨 돌릴 공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옹색한 주거 공간에 견주어 주민들이 너무 많은 빈민지대였다. 방 1개 당 평균 4.8명이 살았다. 비좁은 숙소 탓에 부부 사이의 성관계조차 조심스러웠다. 굶주림도 큰 문제였다. 이렇듯 부부 사이의 긴장이 높아짐에 따라 헤어지는 이들이 많아졌다.

게토 유대인들은 ‘다윗 별’ 표식을 가슴에 달았고, 밤에는 집에 머물러야 했다. 게토에서는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다. 전쟁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외부와의 연결은 몇 개의 전화선과 우체국, 돈을 보내거나 받는 은행이 전부였다. 유대인 학교도 문을 닫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리석어질까 걱정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토 유대인을 통제하는 중요 수단이 먹거리와 연료였다. 이 둘을 줄인다면, 게토에서의 삶은 끝이었다. 유대인 평의회가 나치의 허가를 받아 외부에서 들여와 배급하는 식량은 충분치 못했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식품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전시 하에서 식량은 배급제였다. 문제는 배급량의 차별이었다.

총독부 농업식량국이 1940년 8월 작성한 지침에 따르면, 그곳 독일인들에겐 일주일에 74온스(1온스 28그램)의 빵을 배급하지만, 유대인들에겐 24.7온스를 배급한다고 돼 있었다(라울 힐베르크, 354쪽). 독일인이 받은 양의 1/3에 그쳤다. 나치가 게토에 식량을 건네주면, 배분은 평의회가 맡았다. 여기서도 불평등 문제가 생겼다. 일반 유대인들은 매월 4.5파운드(2kg)의 빵을 배급받았다. 군수공장과 기타 중요한 수출기업의 노동자들, 유대인 평의회 직원들은 일반 유대인들보다 2배의 빵을 받았다(라울 힐베르크, 360쪽).

성인일 경우 식량 배급에도 조건이 따랐다. 공공단체나 민간기업에서 일을 해야 배급이 나왔다. 14세부터 75세까지 모든 연령층의 유대인은 굶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예노동을 해야 했다. 그 무렵 한 젊은 여성 노동자는 새벽 4시 경비대원들에 둘러싸여 작업장으로 가는 행렬을 이렇게 그렸다.

[어두워서 앞이 잘 안 보였지만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다. 아무도 말 한마디 안 했다. 숨을 내쉴 때 나오는 김, 빨래하지 않은 더러운 옷에서 풍기는 악취, 밤 동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밀집해서 사는 집들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주디 버탤리언, 98쪽).

유대인들이 어깨에 삽을 멘 채 줄을 지어 시골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그 무렵 동유럽에서 흔했다. 게토 부근의 독일인 기업들도 유대인 노동자들을 헐값으로 부렸다. 게토가 만들어낸 생산품은 군복, 탄창, 가죽, 매트리스, 용기 등이었고 주요 고객은 독일군과 친위대였다.

▲ 1943년 봄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진압하는 독일군 사령관 위르겐 슈트로프(가운데). 패전 뒤 붙잡혀 처형당했다. ⓒ위키미디어
▲ 1943년 봄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진압하는 독일군 사령관 위르겐 슈트로프(가운데). 패전 뒤 붙잡혀 처형당했다. ⓒ위키미디어

나치도 게토 상황을 ‘재앙 수준’이라 인정

전쟁이 길어지면서 나치는 게토의 식량 공급을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트렸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바르샤바 게토의 1만 명쯤 되는 부자 유대인들은 암시장에서 먹거리를 살 수 있었다. 다수의 빈민층은 암시장에서 팔리는 빵 한 조각마저 살 엄두를 못 냈다. 거리엔 굶주린 거지 아이들이 넘쳐났다. 나치 독일의 행정 실무자들조차도 바르샤바 게토의 상황을 ‘재앙 수준’이라 여겼다.

게토의 이런 모습은 일제 말기의 상황을 떠올린다. 한반도 쌀은 공출로 일본으로 실려 가고, 조선인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동물용 사료나 다름없는 잡곡으로 목숨을 이어갔다. 1945년 8·15 해방 직전에 서울(경성)에 머물렀던 한 러시아 여성이 남긴 증언을 들어보자.

[그때 조선에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을 정도의 음식물만이 배급되었다. 말을 막 배우는 아이의 첫마디와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말이 ‘하이큐(배급)’라는 것을 조선인들에게서 수없이 들었다. 배급표에 따라 지급되는 쌀의 대체물(옥수수, 수수)은 아무리 길어도 (한 달에) 2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생선, 달걀 같은 식료품들은 일본인에게만 지급되었다. 서울에서도 못 먹어 부황이 든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135-136쪽).

게토의 엄마들은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했다. 심지어 몸까지 팔았다. 헐벗은 사람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모습도 흔했다. 행인들은 살아 있을지도 모를 그 사람을 못 본체 하고 그냥 지나쳤다. 다들 힘들었을 테지만, 심성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시절의 모습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휴지처럼 가벼웠다. 한 생존자가 남긴 증언.

[결과적으로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제 각자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기꺼이 형제들의 입에서 음식을 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약 당신이 거리에서 유대인의 시체를 발견했다면, 당신은 그 시체에서 신발을 벗겨 가져갔을 것이다](주디 버탤리언, 106쪽).

또 다른 참극, 티푸스와 식인(食人)

게토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치명적인 참극이 다가왔다. 전염병이었다.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티푸스는 수천 명의 유대인 빈민으로 북적이던 유대교회당에서 먼저 생겼다. 1941~42년 겨울에는 하수도관이 얼어붙어 화장실을 못 쓰게 되자, 인분이 일반 쓰레기와 함께 노천에 쌓였다. 비누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열악한 위생은 티푸스 창궐로 이어졌다.

티푸스뿐 아니었다. 여름에는 장티푸스, 가을에는 결핵, 겨울에는 독감이 특히 노약자들을 괴롭혔다. 가뜩이나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어진 유대인들이 잇달아 숨졌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죽은 사람의 살을 떼먹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1942년 3월21일, 바르샤바 지구의 나치 선전과는 이런 보고를 올렸다.

[게토의 사망률은 여전히 한 달에 5,000명가량을 맴돌고 있다. 며칠 전 식인행위가 처음으로 보고되었다. 어느 유대인 가족의 아버지와 세 자녀가 며칠 동안 차례로 죽어갔는데, 마지막 남은 어머니가 죽은 열두 살짜리 아들의 살점을 떼어 먹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그녀는 살 수 없었다. 그녀는 이틀 뒤에 죽었다](라울 힐베르크, 363쪽).

바르샤바 게토의 월평균 사망률은 1941년 전반기에 0.63%였지만, 후반기에는 1.47%로 높아졌다. 1940년 말부터 1942년 9월 사이에 8만3000명이 죽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출생률은 낮아졌다. 1942년 초엔 사망자 45명 당 신생아 1명이 나왔다(라울 힐베르크 364쪽).

“모든 유대인이 ‘동쪽’으로 이송된다”

동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는 그렇게 소멸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괴링, 친위대 사령관 힘러를 비롯한 베를린의 골수 나치들의 마음은 급해졌다. 독일군이 조금씩 밀리는 상황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을 미룰 수 없었다. 유대인들도 눈치를 챘다.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 의장 체르니아쿠프는 1942년 3월18일 자신의 일기장에 리비프, 미엘레츠의 이송에 대해 썼고, 4월 1일에는 ‘루블린 게토의 유대인 90%가 며칠 내로 이송된다’고 적었다.

드디어 바르샤바 게토 차례가 왔다. 1942년 7월22일 친위대 장교가 평의회 사무실에 나타나 전화선을 끊은 뒤 “모든 유대인이 ‘동쪽’으로 이송된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그는 오후 4시까지 유대인 6,000명을 집결시키라고 지시했다. 날마다 6,000명씩 수용소로 이송될 것이라 덧붙였다. 다만 유대인 평의회 임직원과 유대인경찰, 독일인 기업에 고용된 유대인, 노동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은 이송 대상에서 일단 빠질 것이라 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던 평의회 의장 체르니아쿠프는 절망한 나머지 다음날 밤 평의회 사무실에서 청산칼리 알약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그 무렵 나치 친위경찰들은 바르샤바 주변의 작은 게토들을 ‘깨끗이’ 정리했다. 나치는 유대인경찰들에게 날마다 한 사람 당 7명을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그 자신이 이송될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유대인경찰은 심지어 친구나 친인척까지 붙잡아 열차에 태워 보내야 했다. 그렇게 1942년 8월까지 31만 명의 유대인이 이송되었다. 9월 말 게토에는 6만 3,000명이 남았다. 그 가운데 3만 5,500명은 등록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이들 미등록자들은 일자리도 없었고 따라서 배급도 없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었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끝에 터진 봉기

동유럽 곳곳에서 게토의 유대인들이 열차에 태워져 수용소로 보내지자,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결국 1943년 봄 여러 게토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폴란드 섬유산업 중심지인 비알리스토크에서도 그랬다. 유대인 5만 명이 머물던 이 게토에서 1943년 2월 봉기가 터지자, 독일군은 2,000명을 죽이고 1만 명을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그해 8월에 다시 저항 움직임이 일자, 탱크와 포병부대를 들여보낸 뒤 3만 명의 유대인을 트레블링카와 루블린 마이다네크 수용소로 끌고 갔다. 1,200명의 어린이들은 나중에 아우슈비츠로 다시 옮겨졌다(볼프강 벤츠, 「홀로코스트」, 지식의 풍경, 2002, 70쪽).

게토 봉기들은 유대인 평의회와는 관련이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비판했듯이, 유대인 장로들은 나치에 고분고분했다. 바르샤바 봉기의 주력은 모스크바와 연결된 공산주의자들(PPR), 민족주의자들, 사회주의적인 노동조합주의자들(Bund), 그리고 시온주의 청년들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봉기를 준비하면서 벙커들을 만들고 그 안에다 몇 개월 동안 버틸 만한 양의 식량과 의약품 등을 쌓아두었다.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은 봉기를 준비하면서 무기를 손에 넣으려 애썼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무기는 비쌌다. 런던 망명정부와 연결된 폴란드 저항조직은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1942년 여름 유대인들이 순순히 수용소행 기차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싸우려 하질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43년 1월 이전에 권총 10정, 1월 이후에 권총 50정과 소량의 수류탄을 건넸을 뿐이다. 저항군은 모두 합해 750명이었고, 무기는 100여 정의 소총과 카빈총, 수백 정의 권총, 그리고 수류탄과 화염병이 전부였다.

패배가 뻔히 내다보이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게토 전사들은 행동에 나섰다. 먼저 나치에 협력하던 유대인 경찰 우두머리를 저격해 죽였다. 그의 후임자도 피살됐다. 몇몇 친독 유대인들도 잇달아 총격을 받았다. 1943년 1월 초, 바르샤바를 방문한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게토를 완전히 해체하라”고 지시했다. 1월18일, 친위대 병력이 게토에 들어가 1171명을 죽이고 6500명을 열차에 태워 내보냈다.

▲ 봉기 실패 뒤 불타는 게토를 뒤로 하고 수용소로 떠나는 바르샤바 유대인들. ⓒ위키미디어
▲ 봉기 실패 뒤 불타는 게토를 뒤로 하고 수용소로 떠나는 바르샤바 유대인들. ⓒ위키미디어

7000명이 죽고 나머진 수용소로

본격적인 바르샤바 게토 공방전은 1943년 봄에 벌어졌다. 4월19일 새벽 3시 무장친위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게토 전사들은 일제사격과 화염병으로 탱크의 진입을 막았다. 기습을 받은 독일군이 사상자를 떠메고 물러가자, 유대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독일군 사령관이 문책을 당하고 경질됐다. 4월20일 새 진압군 사령관 위르겐 슈트로프(무장친위대 중장)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100mm 곡사포와 76mm 대포, 37mm 스코다 경전차 등이 불을 뿜었다.

게토 건물들은 불길에 휩싸였고, 벙커 안은 전기와 수도가 끊긴 채 뜨거운 폭발열과 연기로 가득 찼다. 독일군의 화염방사기 공격을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하수구로 뛰어들거나 매트리스와 양탄자를 길거리로 던진 뒤 뛰어내렸다. 독일군에 붙잡힌 몇몇 유대인들은 저항군 지휘부와 동지들이 숨어 있는 곳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게토 전체가 불타고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일부 유대인들은 불탄 건물 안에 있었고, 벙커의 유대인들은 파편 더미에 묻혔다. 하수도에는 유대인의 시체들이 떠다녔다. 5월 1일, 슈트로프는 한밤중에 병력을 게토 안으로 들여보내 벙커를 하나하나 파괴해갔다. 5월 15일, 총격이 그치고 봉기는 사실상 진압되었다. 5월 16일, 슈트로프는 유대교회당을 폭파했다. 전투가 끝났다는 공고였다](라울 힐베르크, 695쪽).

진압군 사령관 슈트로프가 베를린의 힘러 친위대 사령관에게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전투 중에 사망했거나 붙잡힌 뒤 곧바로 처형된 유대인은 7000명쯤이다. 나머지 유대인 3만2000명은 루블린 지역에 있는 수용소(마이다네크, 포니아토바, 트라브니키)로 보내졌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스트로프는 보고서를 이렇게 매듭지었다. “이제 더 이상 바르샤바에 유대인 거주지역이란 없습니다”(볼프강 벤츠, 71쪽).

한 달 가까이 끈 진압작전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은 사망자 16명, 부상자 85명에 그쳤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들어섰을 때 그곳 유대인은 200여 명뿐이었다. 게토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슈트로프 무장친위대 중장은 패전 뒤 붙잡혀 폴란드 전범재판 끝에 1952년 처형됐다.

게토 봉기, ‘혁명적’이지만 한계 지녀

홀로코스트 연구의 선구자 라울 힐베르크(버몬트대, 1926-2007)는 게토 봉기를 가리켜 ‘혁명적’이라 높이 평가했다.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보여온 굴종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유대인들이 무기를 잡고 저항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하지만 제3자가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힐베르크처럼 후한 평가를 내리긴 어려울 듯하다.

무엇보다 봉기가 너무 늦게 일어났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봉기가 터질 무렵 게토의 유대인의 다수는 영양실조, 전염병 등으로 이미 죽었거나 수용소로 강제 이송된 뒤였다. 총을 든 저항군 숫자도 너무 적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나치의 명령을 순순히 따랐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엑세터 대학 명예교수)도 1943년 봄 바르샤바 게토에 남은 거주자들 가운데 5%만이 총을 들었다는 사실을 꼽으며, 유대인의 낮은 참여도를 봉기의 한계로 지적했다. 하지만 늦게라도 압제자에 용기 있게 맞섰다는 것만큼은 높이 샀다.

[비록 애초부터 실패하기 마련일지라도, 반란을 조직함으로써 독일 가해자들에게 유대인이 어디서나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냥 당한 동물처럼 죽지 않고 존엄하게 죽겠다’는 의지를 입증해냈다](리처드 오버리, 「피와 폐허 2」, 책과 함께, 2024, 1142쪽).

또 다른 홀로코스트 연구자 볼프강 벤츠(베를린기술종합대, 독일현대사)는 게토에서 벌어졌던 모든 비극과 고통, 참상에도 불구하고, 게토는 유대인 학살의 주무대가 아니라는 점을 짚었다. 1940년에서 1943년까지 게토는 일종의 ‘학살 대기소’였고 ‘지옥으로 가는 중간역’이었다. 다음 주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수용소로 순순히 끌려갔던 까닭은 무엇인지, ‘지옥의 종착역’인 수용소의 실상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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