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땅 ‘남극’은 흔히 ‘미지의 대륙’이라 불린다. 인류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끝’ 남극에서 지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월동연구대와 하계연구대가 그들이다. 거대한 빙하, 바다를 떠도는 유빙,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블리자드(눈보라). 어떤 위험에도 그들은 남극을 지킨다. 우리는 이들을 ‘국가대표 극지인’라 부르기로 했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찾아 그들을 만나봤다. [남극특별취재팀=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시사위크|남극=남극특별취재팀 “남극을 가야겠다”고 꿈을 꾸었던 청년이 있다. 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황의현 총무다. 스웨덴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많은 눈(雪)을 보게 되면서 극지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극지연구소 입사 순간부터 남극을 생각했다”고 한다.
남극세종과학기지의 총무는 월동대장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월동대장을 보좌하며 기지 전반의 행정 처리와 물자 관리가 주요 업무다. 월동연구대 대원들의 화합과 사기 진작도 그가 담당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다. 사실상 남극세종기지의 어머니 역할인 셈이다. 그가 말하는 남극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의 월동 생활은 어떤지 남극 현장에서 살펴봤다.
◇ “나는 스테이션 매니저… 모든 애로사항은 나에게”
오전 8시 30분 월동대원들이 아침 회의를 위해 세종회관(식당 및 다목적 공간)에 모인다. 총무는 미리 작성해 둔 ‘제38차 월동대 아침조회 자료’를 모니터 화면에 띄우고 회의를 진행한다. 기상 대원의 기상 브리핑이 끝나면 총무는 대장을 비롯해 월동대원들에게 △당직근무자 안내 △하계 연구활동 지원 현황 △하계대 건의 및 요청 사항 △월동 업무 일정 △대장 전달 사항 등을 상세히 브리핑한다.
총무는 조회시간을 활용해 세종기지의 여러 일정과 유의사항 등을 월동대원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 업무 혼선을 방지해 힘든 극지환경에서 월동 효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총무의 하루는 행정 업무의 연속이다. 한국 극지연구소와 지속 연락하며 세종기지의 월동 상황을 공유하고, 수시로 변경되는 기지 내 공지사항을 대원들에게 신속하게 알리는 작업이 부지기수다.
남극의 여름철이라 불리는 하계기간(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에는 총무의 업무가 배가 된다. 이유는 100여명의 연구자들이 방문하기 때문이다. 연구자 1명이 세종기지를 방문하게 되면 방문자의 △입·출남극 관련 서류 확인 △숙소 배정 및 안내 △방문자 오리엔테이션 진행(기지 생활 안내 등) △연구 스케줄 조정(월동대 업무 협조 조율) △연구자 요청사항 청취 등 기타 수반되는 다양한 업무가 모두 총무의 몫이 된다. 악기가 고유의 음을 내려면 조율사의 조율이 필요하듯 세종기지의 모든 톱니바퀴는 총무의 조율로 돌아간다.
세종기지는 남극에 위치한 특수성 때문에 물자 조달이 쉽지 않다. 한국과의 거리 1만7,240km. 4번의 비행기를 갈아탄 후 다시 소형보트로 10km 더 들어가야 비로소 세종기지에 도착한다. 최소 3~4일이 걸리는 거리다. 때문에 보급품(유류보급, 식재료, 생필품 등)은 1년치를 한꺼번에 조달받는다. 보급 받은 물품들은 1년 동안 적절히 분배해가며 사용해야 한다. 한정된 물자를 적절히 배분하며 관리하는 역할도 총무가 한다. 생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다.
제38차 월동연구대는 물자보급이 예년보다 늦어졌다. 보통 12월 중순, 월동 차대 간의 교차가 이뤄지는 시기에 물품을 보급받지만 이번 월동연구대는 1월 중순에 보급이 이뤄졌다. 세종기지의 지난해 12월은 특히 식료품이 부족한 시기였다. 대원들이 민감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황의현 총무의 역할이 빛났다. 먹을 것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료품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나라 기지와 활발히 교류하며 부식 나눔을 요청하는 등이 그 예다.
황의현 총무는 “대원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 지원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며 “다만 보급품이 너무 부족해 어려움이 많지만 불만이 나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 대원 화합과 사기진작… 최우선 과제
남극은 고립된 환경이다. 그래서 대원 한 명 한 명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종기지 월동연구대 총무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된 임무 제1호가 ‘인화(人和)도모 및 사기 진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대원 간의 화합과 의욕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총무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38년차인 세종기지는 예전보다 시설 측면에서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좁은 기지에서 1년간 18명의 소수 인원으로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극이라는 극한의 자연환경이 주는 위험과 고립감, 외로움, 사적 공간 부족 등은 월동대원들을 지치게 만든다. 제대로 대비하지 않는다면 월동대원들의 정상적 사고와 계획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실제 이와 관련된 과학적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독일 샤리테 의과대학·알프레드 베게너 연구소 연구진이 2019년 진행한 연구(Brain Changes in Response to Long Antarctic Expeditions)가 그것이다. 연구진은 실제 남극 대륙에서 14개월 동안 살았던 극지 탐험대원 9명을 대상으로 뇌 변화를 분석했다. 그 결과, 대뇌 피질 전두엽의 부피가 약 2.85~3.81% 축소됐다. 이는 뇌에서 선택적 주의력, 계획적 사고 등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하계 기간이 끝나가면서 황의현 총무의 걱정이 커지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기지에 하계대 연구원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북적거리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월동대원들의 고립감도 그만큼 적다. 하지만 3월 이후 본격적인 ‘남극의 겨울’이 시작되는 동계 기간엔 사실상 외부와 완전히 차단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대원들의 우울감이 생길 수 있는 우려가 제기된다.
‘세종기지의 슬기로운 월동생활’을 위한 전략 마련에 황의현 총무는 고민이 깊다. 현재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이벤트’. 스포츠 경기나 게임 등으로 기지 내 화합, 즐거움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또한 매달 대원들의 생일 파티도 개최하고, 휴일에는 저장해놓은 특식 등을 불출해 다같이 즐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황의현 총무는 “월동 선배들에게 대원들이 각자의 업무에 충실하며 화합할 수 있도록 총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며 “특히 대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벤트(생일 이벤트, 특별 요리 이벤트 등)를 많이 진행하려고 계획 중이다”고 말했다.
이어 “38차 월동대분들은 모두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이 매우 소중한 인재들”이라며 “대원들 모두 초심을 잃지 말고 각자 임무를 잘 마친 후 1년 뒤에 웃으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 김두완 기자, 박설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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