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최근 강간죄 판단 기준을 ‘상대방 동의 여부’로 설정하는 비동의강간죄(간음죄) 입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됐다. 이에 여성단체들은 조속한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일각에서는 무고죄 등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반대하고 있어 입법 여부에 대해 이목이 쏠리고 있다.
3일 시민사회에 따르면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 등 206개의 여성단체는 지난달 31일 논평을 내고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 2건이 성사됐다며 국회에 형법 개정을 촉구했다.
앞서 지난해 말 국민동의청원 누리집에 개제된 ‘비동의강간죄 동의에 관한 청원’과 ‘억울한 흙수저 성범죄 피해자, 비동의강간죄 국회발의 통과 촉구에 관한 청원’ 총 2건은 국회 상임위원회 회부 요건(30일 이내 5만명 동의)을 충족했다.
이로 인해 비동의강간죄는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돼 심의 절차를 거칠 예정이다.
비동의강간죄는 형법 297조 강간죄의 기본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성적 침해가 발생한 경우 현행법상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아 일부 강간 피해자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컨대 항거곤란의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간음한 경우, 항거곤란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동의가 없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 저항의 외적 표시를 남길 여지없이 공포심에 짓눌려 피해를 당한 경우 등이다.
실제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분석한 4765건 강간 상담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강간 피해의 62.5%가 명시적인 폭행이나 협박 없이 일어났다.
이에 여성단체들은 “(국회 국민청원)은 국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변경해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명확히 보여준다”며 “장애, 연령에 따른 취약한 위치와 친밀한 관계를 이용하는 등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따라 발생하는 강간피해가 다수임에도 현행법은 이와 같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2023년 유엔(UN) 자유권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로 모든 형태의 강간을 협박이나 폭력이 아닌 동의부재로 정의할 것을 권고했고 지난해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역시 대한민국 정부에 강간죄의 판단기준을 ‘적극적이고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의 결여’로 정의할 것을 권고했다”며 “국제사회는 대한민국의 강간죄 개정이 미룰 수 없는 인권과 정의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국회와 정부가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추진한 바 있으나 여러 차례 무산됐다. 2023년 1월 여성가족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공개하면서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법무부의 반대로 9시간 만에 검토 계획을 철회했다.
관련 법안은 20대 국회에서 10건, 21대 국회에서 3건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회기 만료로 폐기 수순을 밟았다. 지난해 3월 더불어민주당은 총선 10대 공약 중 하나로 공개했다가 “실무적 착오”를 이유로 철회해 논란을 빚었다.
해외에서는 이미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한 상태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시점까지 영국 등 유럽 10여개국과 캐나다, 호주, 미국 일부 주에서는 형법 개정을 통해 피해자의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1년 10월 발표한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위한 국내외 사례연구’ 보고서를 살펴보면 영국, 독일 해외 입법례에서는 폭행·협박이 아닌 피해자의 동의에 기반한 성폭력 범죄의 입법화가 진행됐다.
영국은 2003년 성범죄법 개정을 통해 동의 없는 성적 행위의 다양한 유형을 비동의 범죄로 명시했다. 구체적으로 △유형력의 사용 또는 유형력에 대한 두려움(제3자에 대한 위협)을 이용한 경우 △피해자가 잠이 드는 등 무의식 상태에서 동의할 수 없었던 경우 △행위의 본질에 대한 기망으로 인해 오해를 한 경우 등을 비동의로 추정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 2016년 ‘인식가능한 의사에 반해’ 타인에게 성적 행위를 강요하거나 타인이 성적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했다. 타인으로 하여금 제3자에게 성적 행위를 하도록 시키거나 제3자의 성적 행위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행위도 처벌 대상에 포함시켰다.
최근 일본 정부는 폭행과 협박이 없었더라도 비동의 표명이 어려운 상태에서의 성행위를 강간죄로 인정하는 형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상태다.
국내에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 모든 성관계가 형벌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로 반대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지난해 5월 진행된 ‘비동의강간죄 신설 적절한가? 형법 297조 개정에 관한 정책 세미나’에서는 비동의라는 이유만으로 폭행과 억압이 없었음에도 성폭력범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남대 경찰학과 이도선 교수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정치권이 첨예한 이견 차로 인해 부담을 느껴 철회를 반복하면서 비동의강간죄 개정이 여러 차례 무산된 바 있다”며 “그러나 이번 국회 상임위원회 회부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음으로 유럽 국가 등 해외 입법례를 참고해 폭행·협박이 아닌 피해자의 동의에 기반한 성폭력 범죄의 입법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강간죄 성립 범위를 확장하는 것을 넘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실효성 있고 현실적인 개정이 필요하다”며 “사법기관도 범죄 입증 책임이 있는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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